언론보도

[시론] 웃으면서 눈을 크게 뜰 수 있는 지혜

  • 2020-05-26
  • 유성식 (수원대 특임교수·교양대) (국민일보)


미래통합당이 총선 참패 후 40여 일간 곡절 끝에 ‘김종인 비대위’를 출범시키기로 한 것은 재건을 위한 첫 번째 가닥을 잡은 것에 불과하다. 어려운 것은 내용을 담는 일이다. 100명에게서 100가지 패배 원인이 쏟아지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십상이다. 2010년부터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에 설치된 7번의 비대위는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거나, 구(舊)체제의 복귀를 부른 무능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면 손댈 문제의 경중과 선후를 서열 짓는 게 첫째다. 지난 총선과 같은 현상유지적 통합이나, 젊은 후보 몇 명을 수도권 험지에 내보내는 식의 얄팍한 이벤트는 잊어야 한다. 집단사고의 착시를 불렀던 대여 강경일변도 노선도 내려놓고, 젊은 후보 찾기와 같은 경박한 대선 담론도 멈추어야 한다.

총선 참패는 30, 40대와 중도에서의 열세가 결정적이었다. 이 둘의 지지를 더 가져오지 않는 한 통합당의 미래가 없다는 것은 부동의 팩트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가 악재였다고 한다. 일부는 맞다. 하지만 미증유의 참패는 코로나 자체가 아니라 통합당의 ‘기저질환’ 때문이었다. 당력은 여기에 집중돼야 한다.

30, 40대에 대해선 보수 진영도 좋은 기억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이던 김종인의 ‘경제민주화’와 2015년 원내대표였던 유승민의 ‘따뜻한 보수’가 이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당시 여론조사 지표가 그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둘 다 내부 반발과 견제로 결실을 보지 못했고, 이후 정책은 오히려 퇴행했다. 통합당에 요구되는 것은 부모 세대와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30대와 40대의 실존에 대한 이해다.

“통합당은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바꿔주어야 한다. 답은 경제 및 사회정책 기조의 대전환이고, 실행 전략의 제시다. 재정건전성 논리만 갖고는 둑이 터진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고, 포퓰리즘에 능한 세력에는 백전백패다. 보수의 혁신성장 모델은 또 어디에 있나.

다음은 탄핵 문제다. 얼마 전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이번 총선에서 과거 새누리당 지지층의 62.9%만 보수로 복원됐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33.1%는 투표를 하지 않거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으로 흩어졌다. 그 원인의 중심에 탄핵이 있다. 촛불 과정을 기점으로 ‘이탈보수(swing conservatives)’가 생겼는데 여전히 유랑 중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스윙보터’라는 중도에 이탈보수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따라서 보수 복원이 중요하며, 그러려면 탄핵에 대한 포지셔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탈보수는 탄핵 당한 보수야당이 무슨 일을 하며 3년을 보냈는지 알고 있다. 과거의 상징을 대표로 세웠고, 알 수 없는 화법으로 탄핵을 뭉갰다. 어렵사리 탄핵에 박수를 보낸 보수층의 손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탄핵은 법적·정치적으로 완성된 사건이다. 책임을 깨끗이 인정하고 분명하게 사과하는 것이 복원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니다. 정책기조 전환과 탄핵 사과는 보수 주류들이 거북해하는 의제다. 통합당은 지역구 의원의 67%가 주류의 본산인 영남 출신이다. 비대위가 의지를 갖고 있다 해도 총선이 막 끝난 시점에서 의원들을 강제할 수단이 없다. 통상 비대위의 권력은 공천권에서 나온다. 결국 의원들의 ‘초월적 선택’이 없다면 두 의제는 현실화가 쉽지 않다.

영국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하원의원 지역구인 브리스톨 주민들에게 “여러분, 미안합니다. 당선돼 의회로 들어가면 지역 이익과 국가 이익이 충돌할 경우 서슴없이 여러분을 버리겠습니다”고 했다. 지금 통합당 의원들에게 절실한 것은 ‘웃으면서도 눈을 크게 뜰 수 있는’ 지혜와 리더십이다.

유성식 (수원대 특임교수·교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