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여야, '中道'로 가겠다지만…

  • 2005-12-16
  • 이내영 (조선일보)
한국의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불신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거대 정당들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이념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최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공통적으로 당의 이념과 노선을 대폭 수정하는 새로운 강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양당의 신강령(新綱領)에서 모두 이념과 노선이 ‘중도(中道)’로 수렴되는 추세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북 정책에서 남북교류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양극화 해소를 위한 새로운 복지정책 등 진보 성향의 정책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신강령은 최근 대중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는 뉴라이트 진영의 주장들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도 경제정책·대북관계·복지정책 등에서 보수적 정책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강령을 수정하고 있다. 특히 외교정책에서 한미동맹의 강화와 강성노조에 비판적인 노동정책 등이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강령이 중도로 수렴되는 주요 이유는 최근 국민들의 이념 성향과 정당 지지도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이후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은 진보의 비율과 영향력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최근 집권여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진보진영에 대한 지지가 하락하고 국민들의 이념 성향은 중도와 보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양당이 중도 노선으로 선회하는 것은 이러한 국민들의 이념성향과 정당지지도의 변화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양당 공히 당의 낡은 이념 및 노선의 변화를 지지하는 혁신세력이 증가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새정치수요모임이나 열린우리당의 신진보연대가 대표적인 당내 혁신세력이다.

양당의 신강령이 중도로 수렴되는 현상은 양당이 낡은 이념을 버리고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또한 민심(民心)의 향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이념 경쟁은 ‘수구꼴통당’ ‘좌파정권론’ 등의 선정적 구호로 상대방의 이념적 입장을 왜곡하고 공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소모적 이념 논쟁은 사회의 이념 갈등을 증폭하고 확대하는 파괴적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양당의 노선과 정책이 중도로 수렴되면 소모적 이념 경쟁의 근거는 줄고 양당이 지금보다는 훨씬 근접한 위치에서 생산적인 정책 경쟁을 통해 차이점을 부각시켜야 할 유인은 커진다. 가장 바람직한 정당 경쟁의 양상은 양당이 과거의 낡은 이념적 틀을 넘어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로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요 현안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 경쟁을 벌여가는 것이다.

물론 양당의 이념과 정책 노선의 거리가 줄어들더라도 양당의 행태와 정당 경쟁의 양상이 단기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양당 내에는 과거의 이념과 노선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또한 최근 사학법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화와 타협보다는 극한대결의 정치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정당 경쟁의 현실이다. 당의 강령에서 내세우는 새로운 이념과 노선이 당원들에게 내면화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국민들은 여야의 본격적인 정책 경쟁이 자리잡아서 정치가 국민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내년 5월 말로 예정되어 있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정치권이 분주하다. 내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대통령 선거를 향한 후보들의 경쟁이 본격화되고 정당들의 이합집산도 예상된다. 다음 대선 과정에서는 정당들이 낡은 이념과 지역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 사회가 직면한 핵심 과제들에 대해 다른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둘러싼 정책 경쟁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정치가 생산적이 되고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 수 있다.

이내영 EAI 여론분석센터 소장 · 고려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