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중국産 세계적 대기업 탄생할까

  • 2005-12-11
  • 이근 (조선일보)

세계은행은 1인당 소득이 1000달러부터 3000달러 사이면 "하위 중등소득 국가", 3000달러 이상 1만달러 이하면 "상위 중등소득 국가"로 분류한다. 중국은 1인당 소득이 1980년대 초반의 250달러 수준에서 4배 이상 뛰어 1000달러를 넘어섰으니, 이미 중진국으로 들어섰다. 2020년의 목표는 3000달러 즉 "상위 중진국"이다.

중국을 이끄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콤비의 기본이념은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로운 사회 건설"로 요약된다. 이 이념은 지난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5중전회)가 채택한 11차 5개년 경제 "규획(規劃)"에 잘 표현됐다. 여기에 제시된 6대 원칙 중의 하나가 "자주적 혁신 능력 제고"였고, 7대 목표 중의 하나는 "세계적 대기업의 육성"이었다.

혁신능력과 대기업의 육성을 OEM(주문자상표 생산)→ODM(독자설계 생산)→OBM(독자브랜드 생산)이라는 단계론의 관점에서 보자. 많은 개도국들이 OEM 방식으로 선진국의 주문을 받아서 생산 납품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쉽게 시작하지만,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곤 대부분 OEM에 고착되어서, ODM이나 OBM으로 가지 못하고 좌절했다. 설계기술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국도 삼성·LG·현대 등 세계적 브랜드 기업을 창출했지만, 1980년대에 700개가 넘는 봉제업체 중 ODM까지 간 업체는 10여 개, 마지막 단계인 자기브랜드로 외국시장에서도 인정받는 업체는 오로라 월드 단 한 개뿐이었다. 그 이행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멕시코나 남아공은 1920년대부터 자동차를 조립 생산했으나 지금도 OEM에 머물러 있을 뿐 독자적 대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 OEM?ODM?OBM의 세 단계 이행에서, 대만은 그런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갔다. 그러나 한국은 설계능력의 확보 없이 바로 OBM으로 갔다가, 현대차의 경우 1980년대 미국 시장 실패에서 제품설계 능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거꾸로 돌아와 이를 확보해 나간 전력을 갖고 있다.

현재 중국은 어느 쪽일까?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CL·레노보·하이얼 등 대기업은 제품설계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내부에 한국 등의 외산(外産) 중간재를 쓰면서도 자기 브랜드 기업으로 크고 있고, 다른 기업들은 대만식 경로를 밟아가고 있다.

제품설계나 개발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일찍부터 자기 브랜드를 고집하는 무모한 전략을 취한 것이 한국의 대기업들이지만, 이제 와서 보면 대만식의 순차적 전략보다는 나아 보인다. 한국은 포천(Fortune)의 글로벌 500대 기업에 13개를 올려놓았지만 대만은 1개도 없다. 일본은 1990년대에 불황을 겪으면서 포천 500대 기업 수가 10여 개 이상 감소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이미 한국과 비슷한 수의 포천500대 기업을 가지고 있다.

또 동아시아와 남미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GDP에서의 연구개발 비중으로 대표되는 자주적 기술개발 노력이다. 이 비율이 한국은 1980년대 중반 1%를 돌파한 후 현재 2.5%를 상회하지만, 남미의 대국들은 1980년대나 지금이나 1%를 하회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1인당 소득 1000달러 수준에서 2000년에 연구개발비 1%를 돌파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이 5중전회에서 선언한 대로 대기업을 기반으로 한 자주적 기술대국으로 등장할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물론, 중국이 과거 20년간 겪어온 고성장과 분배의 급속악화라는 난관(難關)을 넘어선 뒤의 일이다 . 농촌 과잉인구의 규모로 볼 때 성장과 분배가 같이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근 EAI 경제추격연구센터 소장 ·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