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진화론과 경제학

  • 2004-12-29
  • 이근 (한국일보)

주류 경제학의 핵심 사고는 "경제인은 합리성의 전제 아래 극대화를 추구한다", "가장 효율적인 주체가 살아남으며, 경제 전체의 균형 또한 가장 효율적인 상태가 유지된다"는 겁니다. 그럼 현실을 볼까요. 사회에는 가장 효율적인 경제주체만 살아남는게 아닙니다. 그렇지 못한 주체들로 가득하죠.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왕성하게 번식해 가는 현상이 빈번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도 비효율적 형태로 보이는 것들이 수천년 동안 존속하는 이유를 신고전파 경제학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현 상태(균형)가 최적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도 사회개혁이 쉽지 않아 비효율성의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처럼 말입니다. 이 같은 합리성에 대한 의문, 단일한 효율적 균형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진화경제학적 사고의 출발입니다.

주류경제학은 물리학적 방법론을 채택, 경제주체들을 모두 똑같은 극대화의 기계로 봅니다.반면 진화경제학은 생물학적 개념을 도입, 경제주체들간 이질성과 그들을 차별하는 관행(제도)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보다 더 우월한 관행을 가진 주체가 선별(selection)될 수 있습니다. 또 주체들간 차이는 유전자처럼 주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후천적으로 학습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개체들의 적응능력과 돌연변이(혁신)의 개념도 포괄합니다.

진화경제학은 이 같은 개념을 통해 효율적이면서 유일한 균형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복수의 균형이 존재할 수 있고 그들간의 선택이 경제적 효율성 이외의 다른 조건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는 보다 효율적인 상태로의 진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비효율적 상태로의 고착(lock-in) 도 가능하다는 거죠.

쉬운 예로 좌측통행이라는 관행을 볼까요. 좌측, 우측 통행이라는 두 관행(균형)은 우열의 차이가 없고 효율성면에서는 같습니다. 선험적으로 어느 것이 좋다고 판단할 경제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쪽으로의 정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최초에 두 집단이 있어 한 집단은 선천적으로 좌측통행을, 다른 집단은 우측통행을 하게끔 태어났다고 칩시다. 사람들은 마구 길을 다니다 둘 중 어느 한 방식으로 가면 길에서 다른 사람들과 덜 부딪치게 됨을 터득하게 됩니다. 또 태초에 한 집단의 수가 더 컸다면 그 집단은 점점 더 생존상 유리하고 그 반대 집단은 불리해집니다.

이같은 과정이 지속되면서 결국 모든 사람이 한쪽으로 가게 되는 균형이 이뤄집니다. 여기에 어느 한쪽으로 통행하도록 태어난 개체가 후천적 학습에 의해 반대 방식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하면, 이 진화 과정은 가속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구속력을 가진 제도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데, 이것이 하이에크가 주목한 "자생적 질서"의 개념이죠.

위 예에서 진화경제학의 핵심 개념인 "전략적 보완성"과 "경로 의존성"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최초에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특정 전략(관행)을 채택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쪽으로 균형이 성립하게 되며, 일단 그쪽으로 간 후에는 다른 균형으로 가기 어렵다는 것이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입니다.

전략적 보완성이란 특정 전략을 채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도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같은 전략을 채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죠. 이런 개념들을 이용하면 왜 비효율적인 상태가 극복되지 않고 지속되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