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生死 기로에 선 의회민주주의

  • 2004-04-12
  • 이홍구 (중앙일보)

한국의 의회민주주의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선택하는 선거의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 후보를 당선시키느냐, 또는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되느냐가 그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과연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다질 것인지, 아니면 독재로의 향수에 사로잡혀 지난 동안 수많은 고초 끝에 겨우 자리잡힌 민주주의를 표류시키고 말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역사의 고비에 서게 된 것이다.

 

매 맞아가며 새 출발해야

 

우리의 의회정치는 만신창이의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인, 그 가운데서도 국회의원은 부정.부패.타락과 부도덕의 상징으로 국민의 의식 속에 각인되어 버렸다. 국회는 나라걱정보다도 사리사욕에 얽매인 반민주적 작태가 연출되는 곳으로 매도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국회가 온 국민이 때리는 몰매의 대상이 되어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되어온 온갖 정치적 부패와 부정이 말끔히 씻겨버릴 계기가 될 수만 있다면 어떤 매라도 더 맞아가며 새 출발의 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만 지난 50년의 한국정치사를 돌아보면 정치의 중심이 늘 청와대에 있었던 반면, 국회는 정치권력의 변두리에 속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정치부정 및 정치퇴화의 모든 책임을 국회에만 떠맡기는 것이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통령과 행정부의 무절제한 권력집중의 전통 속에서 입법부는 부차적 위치에 밀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모양과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다는 설명을 단순한 변명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란 외침은 자주 들으면서도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란 표현이 익숙지 않은 현상도 재차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런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따지지 말자. 이제 국회가, 특히 16대 국회가 모든 정치적 퇴화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면 앞으로는 국민이 스스로 정치발전의 원초적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4월 15일 총선거에 임하는 우리 국민은 의회민주주의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로 연계될 가능성을 우리는 과감히 차단해야 한다. 민주국가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국민이 선출한 의회가 중심이 되어 운영될 때에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사흘 뒤에 우리의 손으로 뽑을, 즉 "국민이 뽑은" 국회를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보다도 내가 더 국민을 대변한다는 위험한 독선의 만연은 민주주의를 고사시키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나라형편이 답답할 때일수록 그러한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은 커질 수 있다. 법과 절차에 따른 타협의 정치로 국민의 의견과 이익의 최대공약수를 만들어내는 의회주의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참을 수없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의회주의를 뛰어넘는 거리의 정치로, 즉 대의정치를 우회하는 직접적 참여정치로 비약하고 싶은 충동과 유혹은 위험수위로 치솟을 수 있다. 그것은 독재로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무수한 역사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런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더욱 다지고 선택의 책임을 질 각오를 새로이 해야만 할 것이다.

 

이번엔 꼭 후회없는 선택을

 

이번에 우리가 선출하는 17대 국회가 "국민이 뽑은 국회"로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건전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려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뒷받침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국민 모두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헌법을 충실히 지키는 정치적 관행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민주정치란, 특히 의회민주주의란 책임정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국정치사에서 고질적 문제로 작용해온 "무책임한 정치""무책임한 정부"의 폐단을 얼마만이라도 시정하려는 권력구조 개혁의 결단이 이번 총선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면 국가발전의 큰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더 이상 탓할 필요가 없다. 사흘 후 우리는 다시는 후회하거나 탓하지 않을 우리의 대표를 내 손으로 잘 뽑아 정치의 일차적 책임을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회에 맡겨보기로 하자. 우리 국민에게는 정치 외에도 풀어나가야 할 당면과제가 너무도 많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