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대통령의 職業病이란

  • 2003-08-04
  • 이홍구 (중앙일보 )

"외롭고 고달픈 자리라 할지라도 국민 화합과 타협 이끌 책임이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대통령이든, 지난 세대의 황제이든 최고 권력자의 자리가 외롭고 고달픈 자리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다. 지난주 정전 50주년 행사에 미국의 특사로 서울에 왔던 키신저 박사가 재미있는 역사의 일화 한 토막을 오찬 후 잡담에서 풀어놓았다.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에게 빌헬름2세가 나라 걱정으로 사흘 밤을 못 잤노라고 불평을 했는데, 그때 비스마르크는 "그것이 바로 왕이라는 지위가 갖는 직업병"이라고 말함으로써 황제의 미움을 사게 됐다고 한다.


민주화.자유화가 치르는 대가

 

파란만장한 한국의 정치사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나라 걱정으로 인한 고달픔으로 밤잠을 설쳤던 경험이 많았다면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뿐더러 취임 반년도 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수행의 어려움을 자주 토로하는 것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은 아니다. 우리가 처한 전환기적 위기상황을 고려할 때 그런 아픔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비스마르크 식으로 말한다면 대통령이란 원래 그와 같은 자리이고 따라서 아무나 쉽게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며 일단 그 책임을 맡게 되면 모든 어려움을 혼자 외롭게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대통령의 선전(善戰)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盧대통령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의 탈피를 성공적으로 이룬 민주화 이후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혼란에서 비롯되는 시련이다. 민주화와 더불어 각계 각층의 욕구와 주장이 터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여러 이익단체나 지역의 요구가 거리낌없이 분출되는 것도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이익추구나 주장이 갈등으로 치닫고 사회분열을 야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민주화와 자유화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큰 문제는 그러한 갈등이나 분열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결단이나 선택에 승복할 의사 없이 그에게 결정의 책임만을 강요하는 현실이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합리하고 답답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의 입에서 괴롭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닌가.

 

한 예로 새만금 사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끊이지 않는 논란과 시위가 대통령이 처한 어려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업의 폐기를 외치는 쪽이나 계속적 추진을 주장하는 쪽이나 각자의 입장만을 결사적으로 내세우고 있지, 어떤 절차에 따라 결론이 난다면 승복할 수 있다는 합리적 융통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융통성을 보이는 것은 대결국면에서 약점으로 보인다고 생각해 애초부터 양쪽 모두가 고려에서 제외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면 다른 쪽은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곧 국민분열로 연계될 수 있다.

 

그때 선택의 책임을 진 대통령은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원전 수거물 관리시설 후보지의 선택이나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비준 등도 비슷한 고민을 대통령에게 안겨주고 있다.


국면전환 성급한 시도는 자제를

 

이것은 대통령만의 문제는 물론 아니다. 한국의 정치문화나 제도는 타협과 승복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조성하지 못한 채 극단적 갈등과 파탄에 대한 면역결핍증이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다.

 

국가운영에 관한 민주적 의사결정을 제도적으로 담당해야 할 정당과 국회에서마저 타협의 관행이나 승복의 미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정치적 파탄은 사회계약의 토대가 없는 민주국가는 절대로 정치가 안정되게 운영될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증하고 있다.

 

그러기에 작금의 한국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이끌어야 할 일차적 책임도 역시 대통령에게 있다.

 

타협과 승복을 가능케 하는 국민적 합의의 조성, 그리고 그 합의에 따른 절차를 강력히 집행하는 지혜와 의지를 우리는 대통령에게 기대하고 있다.

 

아무리 외롭고 고달픈 자리라 할지라도 분열과 갈등의 여지를 과감히 차단하고, 특히 국면전환을 위한 성급한 시도를 자제하면서 화합과 타협을 통한 공동체의 발전을 모색할 때 비로소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 동북아 중심국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로 향한 우리의 전진이 안정된 궤도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