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데스크진단] 정책은 신뢰를 먹고산다

  • 2006-09-12
  • 김종영 (매일경제)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후기산업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자본이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라고 역설한 바 있다.

 

최근 매일경제신문은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ㆍ경영학자 100명에게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워낙 정치ㆍ사회적으로 이해당사자들이 크게 나뉘고 의견이 분분한 터라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해결책을 찾고 싶어서였다.

 

놀랍게도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신뢰성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설문 결과들이 여럿 있었다. 학자들은 한ㆍ미 FTA협상 자체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선 80% 이상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지만 정부 협상전략에 대한 평가에선 C학점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줬다.

 

정부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주관식으로 답변한 의견이나 제언에서 더욱 뚜렷했다. 한 원로경제학자는 "한ㆍ미 FTA 체결은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임해달라"고 주문하면서 "현 정권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는 차기 정권에서 매듭짓는다는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다른 경제학자는 "국가간 경제질서가 재편되는 FTA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현 정권에 맡겨둔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다"며 "차기 정권에서 체결한다고 얼마나 손해날지 먼저 따져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ㆍ미 FTA정책은 필요하지만 현 정부는 왠지 미덥지 못하다는 얘기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했다고 하는 "비전2030"에 대한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비전2030은 25년 뒤의 경제와 국민의 삶을 조망하고 이에 맞춰 정부가 경제계획을 준비하고 꾸려보겠다는 중장기 계획이다.

 

어찌보면 왜 이제서야 나왔냐고 질책받을 수도 있는 정책 발표다. 하지만 언론과 시민의 반응은 상당히 냉소적이다.

 

"당장 내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25년 뒤 얘기냐. 국민들이 그런 얘기하면 마냥 좋아서 귀가 솔깃할 것 같으냐." "결국 세금 더 내라는 얘기 아니겠느냐. 지금 내는 세금도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모르는 판에…."

 

머리를 맞대고 미래 비전에 대한 논의를 차분하게 해보자는 분위기는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와 정권에 대한 불신이 정책의 정당성과 효율성마저 떨어뜨리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정권 말기의 레임덕 현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근 참여정부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판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과 함께 출발했던 조영길 참여정부 초대 국방장관과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이 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한다고 밝히는가 하면, 윤영관 초대 외교부 장관이 대북정책과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있다.

 

정부정책만큼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잘 들어맞는 영역도 드물다. 특히 경제정책은 정부가 실행에 옮기기 않더라도 발표 하나만으로도 효과를 발휘하는 사례가 많다.

 

정부 당국자의 말 한마디가 흐름을 바꿔놓는 외환시장의 구두 개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부가 한번 신뢰를 잃어버리면 정책 발표는 물론 정책 집행이 수차례 이뤄져도 경제주체들이 믿지 않는 현상이 벌어진다.

 

정책효과가 실제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기업이나 국민들이 움직이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다. 집값을 잡겠다고 내민 "8ㆍ31부동산정책"은 서민들에게 내집마련 부담만 키워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서민들은 "바다이야기"가 국가 공인 도박판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쌈짓돈을 긁어가는 광경도 목격했다. 이제 정책 당국자들은 국민들이 어느 순간부터 정부를 `양치기 소년`쯤으로 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기업들 역시 정부 정책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불안해한다. 정책 불확실성이 확실하게 제거돼야 투자든 채용이든 기업이 움직일 것 아닌가.

 

재경부가 수도권 공장 신ㆍ증설을 추진하는 기업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주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이 같은 규제완화 조치는 이벤트성 발표가 아니라 상시적인 정책으로 꾸준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진짜"나 "완전"이라는 표현도 모자라 그 앞에 "이번에는"이라는 말까지 붙여야 국민들은 믿을까 말까 한다.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나 그걸 믿고 따라야 하는 기업과 국민 모두 신뢰를 잃어 비용만 커지고 시간만 낭비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