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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오는 10월 8일이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발표 2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한일관계에 관한 포괄적인 합의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양국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당시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 서기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기획과 추진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조세영 동서대 교수가 본 이슈브리핑을 통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 선언의 추진 과정과 의의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본 선언이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된 데에는 다양한 국내외 요인이 작용했으나, 무엇보다도 취임 전부터 한일 관계 및 외교에 관한 확고한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역할이 가장 컸던 것으로 평가합니다.

 


 

들어가며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그 의의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세기의 한일관계를 정리하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한일관계사의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지금도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논할 때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필자는 1998년 당시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의 서기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기획과 추진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을 토대로 당시의 추진 과정과 그 의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향후 관련 연구에 유용한 참고 재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관련문서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사실관계를 소개한 내용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의 상황

1998년 2월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1995년 11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 이후 독도, 위안부, 어업 문제 등으로 양국 간의 마찰이 계속되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만료를 1개월 앞둔 1998년 1월 23일 일본 정부가 한일 어업협정의 파기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옴으로써 한일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 듯 했다.

김대중 당선자는 1월 22일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어업협정 파기는 ‘정권의 탄생을 코앞에 두고 매우 모욕적인 일’이라고 불쾌감을 표했다. 그리고 ‘일본 측에 정치적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취임하면 한일관계를 잘 해보려 하고 있었는데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65년 한일 어업협정은 어느 한쪽이 종료를 통고하고 1년이 지난 후에 협정의 효력이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김대중 당선자는 굳이 협정을 파기하지 말고 신정부 출범 후 1년 이내에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일본 측은 한일관계에 부담이 초래되더라도 김영삼 정권이 끝나기 전에 파기를 통고하고 나서 2월에 출범하는 신정부와 새로운 분위기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월 26일 유종하 외무장관이 국회 통일외무위원회에서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배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리상 맞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은 당시의 격앙된 국내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해도 1997년 말에 밀어닥친 외환위기를 하루속히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던 한국으로서는 일본과 협조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식 참석차 방한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에게 ‘취임식 때 연도에 모인 국민들이 저에게 나라를 살려 달라, 물가를 안정시켜 달라, 실업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절실하게 호소하는 것을 보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금년 중에 1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일본의 선도적인 기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협력이 긴요했던 또 하나의 분야는 북한문제였다. 햇볕정책을 통하여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려고 생각했던 김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과도 원만한 협력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한미일 3국이 밀접하게 협력하여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며, 한일 간에 서로 차질 없이 충분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양쪽의 대북정책이 모두 성공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에게 ‘남북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 등 여러 가지 문제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밀접히 강화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한 발언에 대일외교에 관한 김 대통령의 기본자세가 잘 나타나 있었다.

 

공동선언의 준비 과정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1998년 2월 김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실무적인 구상과 검토가 시작되어 10월 8일 발표 때까지 약 8개월에 걸친 준비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심각하게 악화된 한일관계를 김 대통령의 취임 첫해에 복원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양국 정부가 모두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있었다.

2월 25일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 일본은 전직 총리 2명(나카소네, 다케시다)과 야당 당수 2명(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사민당수, 칸 나오토(菅直人) 민주당대표) 등 정계 지도자 다수를 파견하며 한국의 신정부와 원만한 관계 구축을 희망하는 분위기였다.

1998년 중에 김 대통령의 국빈방일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발표라는 초보적인 아이디어는 일본 측에서 먼저 타진해 왔다. 양국 실무진이 이에 관한 의견을 조율하는 가운데 3월 21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 외무장관회담(박정수 외교통상부장관 -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외상)에서 양측은 4월 초 ASEM 정상회의 기회에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4월 중에 어업협정 교섭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한일관계 복원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4월 2일 ASEM 정상회의가 열린 런던에서 김대중 정권 출범 후 첫 번째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양측은 한일관계의 복원과 발전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총리는 김 대통령의 국빈방일을 초청했다. 50분 간의 짧은 회담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김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나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으나, 4개월 후인 7월 30일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하시모토가 퇴진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하시모토의 후임으로 오부치 외상이 총리에 취임하여 김대중-오부치 체제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8월 초 한-러 외교관 맞추방 사태로 사임한 박정수 장관의 뒤를 이은 홍순영 장관이 오부치의 후임인 고오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상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일본 언론들은 4월 2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작성하는 작업을 개시하기로 합의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는 파트너십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의 언론 보도에는 파트너십 합의라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 측 실무진은 하시모토 총리가 파트너십 관련 발언을 하는 것으로 준비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준비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때문에 1998년 가을 김 대통령의 국빈방일 때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다는 계획은 5월 22일 개최된 한일 외무장관회담(도쿄)의 결과로서 대외적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일본 측이 제시했던 공동선언의 아이디어는 개략적인 방향을 제시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를 구체화하여 기본 골격을 만든 것은 한국 측이었다. 6월 하순 서울에서 열린 한일 아주국장 협의가 실무 작업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한국 측은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문서 형태로 작성하여 양국 정상이 서명하고, 세부사항은 별도의 부속문서인 ‘행동계획’(Action Plan)으로 작성하여 양국 외교장관이 매년 정기외무장관회담에서 점검해 나갈 것을 제의했다. 일본 측도 이에 흔쾌히 동의함으로써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준비는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7월부터 한국 측의 공동선언 초안 작성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외교통상부는 일본과 여타 국가들이 발표한 파트너십 문서들을 분석하고, 내부 관련부서와 외부 관계부처의 의견을 수렴하여 초안을 만들었다. 일본 측과 실무협의는 아시아태평양국장과 동북아1과장의 두 채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8월과 9월에 걸쳐 집중적인 협의가 이루어졌다.

어업협정에 관한 교섭은 파트너십 공동선언과는 별도의 채널로 진행되었다. 어업협정은 어민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인 만큼, 양측 모두 어업분야에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한국은 김봉호 국회의장, 일본은 사토 고코(佐藤孝行) 자민당 국제어업특별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실무협상은 아시아태평양국 심의관이 창구 역할을 맡았다.

공동선언의 준비 작업이 한창이던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외국의 미사일이 일본의 영공을 통과한 것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내용에도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뜻을 포함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 측은 공동선언의 내용 가운데 특히 한일 안보협력의 강화와 대북정책에 관한 협조 부분을 중시했다. 또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한국이 지지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켜 줄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 측 내부에서 강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어 공동선언에는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기여와 역할을 평가하고, 금후 일본의 그와 같은 기여와 역할이 증대되는데 대한 기대를 표명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는데 그쳤다. 한편 한국 측이 공동선언의 내용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 사죄 표명과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 경제협력의 강화 부분이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

대통령의 철학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이미 한일관계에 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95년 4월 12일 아태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 방일했을 때 일본기자클럽 초청 연설에서 김 대통령은 ‘한일 양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적 신시대를 이룩하기 위해서 먼저 과거의 올바른 청산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 한국에서 행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자발적인 과거사 청산 노력이 필요하며 양국 전문가들의 과거사 공동연구와 젊은 세대에 대한 올바른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의 발언에는 과거사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었다. 대통령 취임 후 자신의 방일을 통해 과거사가 두 번 다시 문제되지 않도록 깨끗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거나, 일본이 독일의 과거사 청산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외교통상부의 실무진은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과거 역사를 깨끗하게 청산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어느 한 정권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과거사의 청산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결과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청산’이라는 표현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선언하고 나서 훗날 다시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 한국은 제대로 된 청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해 일본은 이미 청산되었다고 한 것을 왜 다시 문제 삼느냐고 반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외교통상부는 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과거사를 ‘청산’한다고 하기 보다는 ‘정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러한 의견 개진이 효과가 있었는지 대통령의 발언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취임 초기처럼 나의 방일을 통해 두 번 다시 과거사가 문제되지 않도록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는 강한 표현을 쓰지 않고, 독일의 과거사 청산을 인용할 때도 ‘일본에서는 독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게 되었다.

8월 초 일본 세카이(世界) 잡지와 인터뷰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김 대통령은 ‘일본 방문에서 과거에 대한 양측의 의견을 ‘정리’하는 문제 등을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우호협력관계에 이르기에는 부족했던 것을 이번 방일 기회에 ‘보완’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김 대통령은 미래를 열어나가기 위해서 과거사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국인들은 과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일본이 정말로 과거를 잘 알고 반성한다면 한국인들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과거에 대해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데 일본의 힘은 더욱 강해지니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일 양측의 자세

일본 측은 한국의 신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통령 방일과 관련하여 한국 측이 또다시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천황에 대한 과거사 사죄 요구의 가능성을 우려했다. 4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하시모토 총리가 ‘과거의 역사는 바꿀 수 없고 과거 위에 현재가 있는 바, 이를 토대로 미래를 바꾸어 나갈 수는 있다.’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일본 측은 과거사 문제를 회피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도 일본의 역사인식은 무라야마 담화에서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담화의 수준에서 미리 방어선 치려는 것으로 보였다.

한편, 한국 측 실무당국은 일본이 과거사에 관한 명확한 인식을 표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나, 일본에 대한 압력이나 외교협상을 통하여 이를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사 사죄 표현을 놓고 사전에 외교교섭을 벌이면 오히려 마찰과 대립을 초래하여 득보다 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김 대통령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조에 따라 공동선언 준비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1998년 8월 세카이(世界) 잡지와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은 ‘외부로부터 과거사의 청산을 강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결국 이것은 일본 국민과 정부가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고 청산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과거사 문안의 성안 경위

한국 측은 6월의 한일 아주국장 협의를 앞두고 대통령 방일 시 발표할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 표명 내용을 포함시켜 양국 정상이 서명한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이전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 시 각각 일본 측이 천황의 만찬사라는 형식을 빌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유감의 뜻을 밝힌 적이 있으나 공식적인 문서의 형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측 내부에는 일본이 반성과 사죄의 문서화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심지어는 과거사 반성과 사죄의 문제를 일본에 대한 압박용으로 계속 남겨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의 실무진은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문서화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보았다. 무라야마 담화는 사회당 출신의 총리가 이끄는 연립정권에서 나온 것으로, 내각 결정을 거쳐서 발표되었다는 공식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본 측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문서로 만들어 양국 정상이 서명까지 하면, 한국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문서를 통하여 명확한 과거사 인식을 표명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일본도 만일 훗날 한국으로부터 일본이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될 때 이 문서를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6월 하순 개최된 아주국장 협의에서 한국 측은 위와 같은 아이디어를 일본 측에 제안했다. 과연 일본이 동의할지 자신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 일본 측에서도 찬동의 뜻을 표명해 주었다. 일본 측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표명하게 되면 한국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래를 향한 화해와 협력의 자세를 표명해 주기를 희망했다. 한국 측 실무진은 김 대통령이 이미 그러한 생각을 밝힌 적이 있었던 만큼 일본 측의 희망을 수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기본 구조와 과거사 문안의 핵심적 방향은 사실상 이때 결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에는 전체적으로 기본 뼈대에 살을 붙여 나가는 작업만 남아있는 셈이었다.

9월에 들어 본격화된 공동선언 문안 협의에서 한국 측은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을 토대로 이를 한일관계에 맞추어 좀 더 구체화하기를 희망했다. 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피해를 적시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그 후 실무당국 간의 활발한 의견교환을 통해 과거사 문안이 성안되었는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일본 측이 처음으로 ‘사과’가 아니라 ‘사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동의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일본 측은 과거사에 관한 인식을 표명할 때 항상 ‘오와비’(おわび)라는 일본어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사과 또는 사죄라는 한국어 번역을 혼용해 왔다. 외교통상부 실무진은 일한사전에 일본어 ‘오와비’가 한국어로는 사죄로만 나와 있거나, 사죄 또는 사과로 병용되어 있음에 착안하여 이를 근거로 사죄라는 표현을 관철시켜보려 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일본 측은 공동선언 일본어 본에는 ‘오와비’로, 한국어 본에는 ‘사죄’로 표기하는데 동의했다. ‘사죄’ 표현을 둘러싼 막바지 줄다리기 때문에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문안은 대통령이 일본에 도착하는 10월 7일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 최종 확정될 수 있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의의

1998년 10월 8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는 도쿄의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후,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공동선언의 정식 명칭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애초에 일본이 제안한 공동선언의 명칭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21世紀に向けた新たな日韓パートナーシップ共同宣言)이었다. 그러나 한국 측은 내부검토를 거쳐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표기하기로 했다. 명칭의 일부에 차이가 있지만 양측은 각자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표기하기로 양해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정치, 안보, 경제, 인적.문화교류, 글로벌 이슈 등 5개 분야의 협력원칙을 포함한 11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동선언의 부속서로서 함께 발표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행동계획’(Action Plan)은 43개 항목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한일 외교사상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공식 합의문서로 명확히 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공동선언에 양국 정상이 직접 서명까지 한 것은 문서의 공식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또한 양국이 1945년 이후에 이룩한 발전과 성과에 대해 서로 긍정적으로 평가해 줌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 표명에 대한 균형을 맞추었다. 이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사죄하기만 한다는 일본 내부의 반발을 완화하고,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일본 국민들에게 널리 지지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일본의 보수우파는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통해 한국이 앞으로 과거사 문제를 더 이상 제기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10월 8일 요미우리신문은 석간 1면 기사에서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과거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앞으로 과거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명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같은 날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 관방장관이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존중하며 더 이상 양국 간에 역사에 관한 잘못된 발언 등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듯이, 공동선언의 발표가 곧 문제의 종지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일본에 더 이상 반성과 사죄의 표명을 요구하지 않겠지만 일본도 공동선언과 어긋나는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던 것이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또 다른 의의는 한일협력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은 양국이 추진할 수 있는 협력 과제를 분야별로 거의 모두 망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시대는 변했지만 지금도 한일협력의 내용은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제시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계기로 활성화된 협력 분야 가운데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은 그 후의 한일관계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김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한국이 외래문화를 독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쇄국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국내여론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개방에 대한 반대 의견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의 국빈방일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발표라는 커다란 계기가 없었다면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안보협력도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분야의 하나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일 간의 안보협력은 인적교류의 수준에 머물렀으나 김대중 정권 출범 후인 1998년 6월 처음으로 외교·국방 당국의 국장급이 참여하는 한일 안보정책협의회가 개최되었다. 북한의 핵개발 저지와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대응이 시급한 과제였던 상황에서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은 안보분야 협력을 한 단계 격상시켜 공식적,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발표는 어업협정 파기로 바닥을 찍었던 한일관계를 불과 10개월 만에 최상의 관계로 회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한일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명실상부하게 21세기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열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 후 3년이 채 되지 않은 2001년에 일본 교과서 문제가 불거져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 대통령이 ‘이번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 문제는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매우 미흡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할 정도였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가지고 한일관계의 새 시대를 열기에는 양국 간의 갈등의 뿌리가 너무 깊었던 것이다. 하지만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한일관계에서 뚜렷한 이정표를 만들어 주었으며 미래의 협력을 위한 귀중한 디딤돌이 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가며

1998년 10월의 김대중 대통령 국빈방일과 파트너십 공동선언 발표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외환위기 극복과 북한 핵.미사일 문제 대응이라는 상황적 요인이 큰 작용을 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한일 양국 외교당국의 실무역량과 협조관계, 외교통상부와 청와대의 긴밀한 소통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의 경륜과 한일관계에 관한 철학을 들고 싶다. 김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이미 한일관계와 한국의 외교정책 일반에 관해 확고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인 1995년 4월 12일 일본기자클럽에서 행한 연설은 한일관계 전반에 관한 김 대통령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외교통상부 실무진은 이 연설문을 통하여 신임 대통령의 외교철학을 파악할 수 있었다. 취임 1개월 전인 1998년 1월 22일에 있었던 아사히신문 인터뷰는 한일관계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와 주한미군의 주둔 필요성, 동북아 다자안보에 이르기까지 대외관계 전반을 아우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처음부터 외교정책의 상세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무진은 그 기조에 따라 실천방안을 잘 준비하기만 하면 되었다. 대개는 참모와 실무조직이 성안한 내용을 대통령이 받아서 자신의 정책으로 삼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에는 순서가 거꾸로 바뀐 셈이었다. 따라서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크게 보아 김 대통령 자신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 집필: 조세영_ 동서대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2011년8월~2012년7월)을 역임했고, 주일본대사관, 주중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저서로는《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2014),《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2004)가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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