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공동선언 후 세계의 관심은, ‘34세의 노련한 독재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속내와 정체성에 쏠리고 있다. 김정은은 구소련 개혁·개방의 엔진으로 냉전질서에 종지부를 찍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뒤를 이을 수 있을까.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르바초프의 후계자로 김정은을 옹립하는 것은 우리로선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은 한국민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현란한 마술 쇼로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이복형 독살, 고모부 고사포 처형으로 피에 굶주린 냉혈한, 천인공노할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전·서울 핵 불바다 발언으로 각인된 ‘핵 미치광이’ 같은 악마적 이미지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낸 ‘판문점 평화마술쇼’였다. 눙치기, 퉁치기, 본말전도 화법을 주특기로 한 두둑한 배짱과 갈고닦은 심리전 대가로서 만만찮은 내공을 과시했다. 그러나 북한 주민 인권 말살책 등 김정은 체제의 본질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헌법보다 우위인 북한 노동당 규약 서문은 ‘조선노동당은 전 조선의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전선을 강화하고…남조선에서 미제 침략 무력을 몰아낸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이 문구 수정 없이, 김정은을 개과천선한 ‘평화의 사도’로 분칠하는 건 위험천만한 자해행위가 될 수 있다.

리명수 총참모장이 판문점 정상회담에 갑작스레 나타난 배경도 주시할 대목이다. 리 총참모장은 김정일 시대인 1998년 핵전략의 신호탄인 대포동미사일 발사를 지휘하고 북한의 핵전쟁전략을 완성한 군부 3인방(김영춘·리명국) 중 현재의 실세다.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는 “리 총참모장 참석은 김정은이 앞으로 북한 체제유지를 위한 비핵화 협상을 군부의 동의하에 하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북한이 2016년 7월 6일 공화국 정부 성명으로 내건 체제보장 5개 원칙에도 주목해야 한다. 김정은은 미·북 수교와 평화협정 시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표현 대신, 미국의 전략자산을 한국에서 철수하며 한미연합훈련에서 핵전략 자산의 전개를 중지하고, 재래식 및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을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내용상으로 핵전략 자산 관련 조항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해체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의 경고를 귀담아들을 때다. 김정은이 3·26 북·중 정상회담에서 밝힌 ‘단계적이고 동시적인’이라는 발언의 의미는 핵보유국으로서 핵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미·북 정상회담이 핵보유국 군축회담으로 흘러가면, 경제협력 보상 단계에서 수백조 원대 비용이 한국에 전가될 가능성이 커진다.

김정은은 미국의 리비아식 비핵화 요구를 백기 투항으로 인식해 거부하는 대신 비핵화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인 억류자 송환 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는 제2의 평화마술쇼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국제 공조는 ‘북한을 적으로 상정한 압박 공조’가 아니라 ‘북한의 바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선의의 공조’”라며 “이 정신이 지속적으로 강조돼야 김정은을 고르바초프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핵문제 해결의 방향은 민족 공조가 아닌 국제 공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