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성찰의 적기(適期)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유럽에서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이 이루어졌다. 한국도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파면으로 민주화 30주년을 맞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양상은 다르지만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두 차원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투입(input)의 위기’다. 애초 민주주의는 그 이전의 정치제도보다 더 많은 민(民)을 대표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현존 민주주의를 보면 그 ‘투입’이 별로 대표적(representative)이지 못하다. 많은 국가에서 투표율은 상당히 낮고, 그마저 하락하는 추세이다. 당선된 후보가 과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득표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의 풀(pool)도 좁다. 민주주의가 소수의 돈 있는 자들이 정치권력(혹은 정치권력도)을 획득하는 금권정체(plutocracy)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이제 진부하다. 여기에 노년층의 과대(過大) 대표와 청년층의 과소(過少) 대표로 요약되는 세대간 불의(inter-generational injustice) 문제나 강대국의 과대 대표와 약소국의 과소 대표로 빚어지는 글로벌 불평등을 추가하면 민주주의가 직면한 도전은 결코 녹녹치 않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또 한편 ‘산출(output)의 위기’이기도 하다. 국민들은 선량(選良)들이 만들어 내는 법, 정책 등 정치제도가 산출하는 ‘산출물’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정치공동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 여러 공공문제의 해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국정지도자의 리더십과 결단력, 관료의 청렴성과 전문성, 정치인들의 협상력과 정책지식, 정부 각 부처 간 조정과 협업, 여타 제도적 환경의 성숙 등에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심각한 부족과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중요한 정책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거나 잘못 ‘해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에 가장 큰 도전을 제기하는 것은 투입 차원의 위기도, 산출 차원의 위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현존하는 대안’, 다름 아닌 ‘중국 모델’의 실재다. 현존 대의민주주의에 제 아무리 큰 흠결이 있고 허다한 비판이 제기되어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안이 없다면 별로 큰 위기에 빠질 리는 없다. ‘중국 모델’은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가진 취약점, 특히 정책성과(policy performance)의 부족 문제를 파고들면서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이 민주주의에 대해 제기하는 도전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정치제도는 투입보다 산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산출해 내는 정책이 얼마나 실제적인 민생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국가안보, 경제성장, 정치발전 등 국가 본연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해 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투입 과정에서 국민의 적절하고 균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둘째, ‘투입’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시하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 즉 ‘인구의 각 부분이 얼마나 적절하고 충분하게 대표되고 있는가’가 아니고 오히려 ‘전체 인구 중 얼마나 유능하고 탁월한 인재를 경쟁 또는 다른 방식을 통해 발굴하고 훈련시켜 고위 정책결정자의 지위에까지 올라가도록 하는가’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셋째, 유능하고 탁월한 인재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대부분의 민주주의가 전가의 보도처럼 중시하고 있는 ‘투표’는 별로 적절치 않다. 오히려 중국식의 당내 경쟁 승패, 지방정부 봉직 경력 등이 더 효과적인 표지(標識)라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유능하고 탁월한 인재들을 발굴하여 행정과 정책을 위임하면 국민이 원하는, 양질의 정책 산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의제를 비판한 왕샤오광(王紹光 2010)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서구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하고 투표에 참여하는 데 그치는 ‘선주(選主)’에 불과하다. 이는 서구의 민주주의가 ‘민주(民主)’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그 방식과 절차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는 ‘선주’가 투표 따위로 ‘대의(代議)’되는 것이 아니고 국정의 주인인 민이 원하는 정책이 유능한 국정담당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현되어 민이 널리 혜택을 보는 체제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거에 따라 기존 서구식 대의민주주의보다는 중국식 ‘공적(功績)주의(meritocracy)’ 혹은 ‘공적민주주의(meritocratic democracy)’가 우월하다는 주장이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Bell 2015; Bell and Li 2012; Li 2012; Li 2013).

 

중국의 ‘공적민주주의’에서 우수한 정책성과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산출되기 위해서는 국정담당자들이 민의 직접적인 영향력, 즉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autonomy) 혹은 절연성(insulation)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전복적(顚覆的) 여론의 등장을 방지하고 그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인터넷의 적절한 통제와 효과적인 관리가 관건이다. 중국 정부는 ‘스마트한’ 검열, 그리고 차이나넷의 구축과 발전을 통해 정보통신기술혁명이 가져올 불안정적인 요인들을 효과적으로 예방해 나가고 있다(유럽외교관계협의회 2013: 150-157).

 

하지만 제아무리 스마트한 검열과 통제라 해도 정보통신기술이 시민과 정치에 전반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완벽하게 차단하거나 방지하기는 힘들다. 3억 명의 중국 블로거들이 차이나넷에서 특정 이슈에 대해 논쟁을 진행하거나 공직자의 부정부패가 예상 불가한 양상으로 폭로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중국에서는 인터넷과 온라인 공간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과 기존 매체의 변화로 인해 정보 교류와 소통도 활발해지고 있다. 온라인 여론의 주체는 젊은 세대이고, 그 내용은 주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이다. SNS 이용자의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이 도시거주자인데, 이들은 개인적 자의식이 발달하여 훨씬 더 자유로운 표현에 익숙해져 있으며(胡泳 2006), 불의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주적 참여의 열망을 가지고 있다(張熙錦 2011). 온라인 여론은 오프라인 집단시위와 연결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집단시위는 1993년에 1만 건, 2004년에 7만 4천여 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0년에 중국 전역에서 발생한 집단시위는 18만 여 건에 달하며 이는 2006년에 비해 두 배 증가한 것이다(New York Times 2011.08.16). 대부분의 시위는 정부 혹은 개발업자들의 무단 또는 불공정 토지 점용, 지방 간부의 권한 남용, 기업의 임금 체납 등과 관련이 있으며, 정치운동이라기보다는 민생 운동, 권리보호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최근 들어 시위가 빈번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직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이동률•서봉교 2012).

 

중국의 공적민주주의 하에서 투입 면에서의 대표성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급부상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국정책임자를 국민 손으로 뽑고 정치체제의 대표성을 증진하는 것이 ‘민주’가 아니고,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대신 잘 알아서 설계하고 실현하는 ‘위민(爲民)’이 참된 ‘민주’라고 개념의 도치(倒置)가 이루어지고, 대의민주주의보다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가 낫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위민 = 민주’의 등식을 지탱하는 근간은 바로 대다수 국민을 만족시킬 만한 우수한 정책의 지속적인 산출이다. 그러나 역사상 어떤 정부도 성공적인 정책만을 영원히 지속적으로 산출한 적은 없다. 크게든 작게든, 가까운 장래이든 먼 미래이든 정책 실패는 발생할 것이다. 아마도 중국의 대안적 민주주의는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 부정적 파장을 ‘스마트한’ 여론 통제로 은폐하거나, 효과적으로 수습하거나, 최소한 온라인 여론이 오프라인 집단시위로 연결되지 않도록 잘 관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울러 행정•정책과정 그리고 법 집행의 공정성과 불편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책의 지속적인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급변하는 정책환경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이란 중국 정부도 최근에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창의성(創新)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양질의 정책이 지속적으로 산출되기 위해서는 국정담당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창의적이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부족한 창의성을 시장이나 시민사회 등 민간으로부터 빌려오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중국 민주주의의 도전이 있다. 중국 민주주의는 ‘민주’의 재정의를 통해 서구식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으로 등장했다. 서구적 대의 없이도 ‘민주’를 더 잘 실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정책의 지속적인 성공의 바탕을 제공하는(아울러 경제발전까지 가능케 하는) 창의적인 사회를 욕심 낸다면 ‘자유’ 또한 중국적으로 재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서구적 자유 없이도 ‘창의성’을 만들어 낼 재간이 있으면 중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직면한 서구 대의민주주의의 막강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의 ‘민주’ 실험이 성공할지 그 주된 승부처는 기실 ‘민주’가 아니고 ‘자유’다. ■

 

 


 

 

저자

김선혁_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정치, 비교정치, 정부개혁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 “The Changing Modes of Administrative Reform in South Korea”(2017, 공저), “정보통신기술혁명과 민주주의의 미래”(2016), “NGOs and Social Protection in East Asia: Korea, Thailand and Indonesia”(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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