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촛불 민심이 이끌어낸 결과로 평가됩니다. 과거와 달리, 이번 촛불 시위가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분노가 응축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김석호 서울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즉,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오랜 기간 축적돼 있던 불공정과 비상식에 대한 절망이 심화되는 양극화와 결합되면서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분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촛불 시위가 과거처럼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진정한 시민사회가 조직돼야 하며, 시민들의 지속적이고 활발한 정치 참여가 요구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광장이 열리다

 

이 글은 1987년 민주화 운동부터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그리고 시민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시민사회의 성장을 도모했다. 그 결과, 50여 년만의 정권교체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고, 시민사회의 조직화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여전히 명망가 중심의 이익단체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시민의 목소리보다는 정치권과 대기업과의 관계에 더 집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시민사회 활성화 기조가 오히려 ‘시민 없는 시민사회’ 라는 기형적인 공론의 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이 시민의 목소리와 유리되면서 국가와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존도는 점차 높아졌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미약하게나 남아 있던 시민사회의 리더십마저 제거하는 기조로 일관해 이들을 정치권에서 배제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항의하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열렸던 광장은 얼마 되지 않아 닫혔고, 그 후 시민사회는 결빙된다. 더욱이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시 열린 광장은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광장에서 흘러 넘쳤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가시적인 정치적 성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회성의 외침에 그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라는 체념, 자조, 냉소, 분노가 시민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2016년 가을 JTBC의 보도로 시작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광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국회는 광장의 열망과 목소리를 에너지 삼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의원 299명 중 234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과거와 비교해 이번 열린 광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규모 면에서 매우 큰 데에다 가시적인 성과까지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거 광장과 현재 광장의 성과를 다르게 만들었을까? 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토요일 휴일을 포기하면서 광장에 지속적으로 나왔을까? 그 이유를 사안의 심각성에 기인한 자발성의 폭발이 아니라 시민들의 응축된 분노에서 찾아보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광장에서 확인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 절박한 목소리와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단기적 성과를 시민사회의 미래와 연결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일곱 번의 촛불집회와 탄핵소추안 가결을 두고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직접민주주의의 또는 광장정치의 승리로 해석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입장이다. 오히려 탄핵소추안의 통과는 촛불집회로 불리는 광장정치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자 도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앞으로 시민사회가 광장에서 확인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과거 광장의 실패를 답습할 수도 과거의 실패 경험을 자양분 삼아 전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가꾸는 시민사회의 출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반복되는 좌절은 또 다른 국정농단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누가 광장에 나오는가?

 

최순실 국정농단에 시민들이 특히 분노하는 이유는 국정농단이라는 단어 안에 한국사회에 만연한 비상식과 불공정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에서 선출된 정권의 정당한 권력 행사 대신 비공식 집단의 지배가 있었다는 사실에 시민은 분노했고 광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탄핵소추안 통과라는 결실을 맺었다. 과거의 광장과 최근의 광장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과거에 광장이 열렸을 때에도 시민의 분노는 거셌고 그들의 외침은 절박했지만 이번처럼 전 국민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2016년의 광장이 특별해진 이유를 더 찾아봐야 한다.

 

2016년 광장에서 시민들은 연대의식을 확인했지만 지난 두 달은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 정치권을 변화시키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정치권은 여전히 시민에게 믿음을 주고 있지 못하며, 시민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수가 아닌 소수를 위해 불투명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규칙과 절차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나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시민은 없다. 민주주의가 고도화되고 시장이 발전할수록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간의 격차는 커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 간•집단 간 경쟁 수준이 높은 한국에서는 규칙과 절차를 고지식하게 지키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법과 제도의 준수는 사회적 인정이나 성공보다는 나와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에 피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예측 가능한 규칙을 만들고, 이를 집행할 심판 역할을 하는 국회나 행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다 보니, 기업도 개인도 공정한 실력 경쟁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다. 대신, 한 번의 편법과 위반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이득은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이다.

 

더욱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통치행위와 법치라는 미명 하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지 않은가? 이 과정에서 분노는 응축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2016년의 광장이 과거와 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비상식과 불공정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계층 사다리의 실종으로 더욱 깊어졌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불안이 현실이 된 지금, 특권층에 대한 분노가 전 세대와 전 계층에 시간을 두고 꾸준히 확산되어 온 것이다. 2016년 광장의 차별적 특징 중 하나는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다양한 집단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젊은 층과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적극성은 마치 1987년 민주화 항쟁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뜨겁다. 최근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서울 등 광역시 시민을 대상으로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참여자 중 ‘20대/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45%, ‘대졸이상’ 68.3%, ‘월 가구소득 500만원이상’이 42.2%로 나타나 ‘젊고 고학력이면서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 광장의 주도 세력으로 밝혀졌다.

 

결론적으로, 2016년 광장은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충격으로 촉발되었지만 전 국민의 마음 속에 오랜 기간 축적됐던 비상식과 불공정에 대한 절망과 냉소, 분노가 불평등의 심화와 결합하면서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분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광장이 소멸할 것이란 예측이 많지만, 고질적인 병폐와 적폐가 말끔히 제거된 것이 아직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을 보면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의미에서 탄핵소추안 통과는 시민사회에 새로운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광장에서 분출된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진짜 ‘시민사회’가 조직돼야 한다. 시민사회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시민사회의 본연의 임무인 감시와 견제 기능이 활성화되고 제도화돼야 한다.

 

새로운 숙제, 광장의 제도화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박원호는 한국 사회가 촛불시위를 통해 시민들이 보여준 참여의식과 그 과정에서 체감하고 느낀 연대의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2•제3의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의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연대의식을 ‘광화문의 정체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광화문의 정체성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한국 시민사회는 분명 ‘시민 없는 시민사회’와 ‘소수 집단의 과잉 대변’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민의 자발성에만 기댄 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기업만 바라보는 한 2016년의 광장도 과거의 광장과 마찬가지로 일회성 분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광장의 지속을 위해 시민사회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우선 한국사회에 만연한 ‘자발성의 신화’ 현상이다. 이 현상은 모든 광장에는 배후세력이 존재하고 이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과 조직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광장을 메운다는 정치적 공격을 의미한다. 이는 제도권이 광장의 목소리를 폄훼할 때 주로 사용하는 논리이며, 시민들의 저항에 대한 혐오를 전제로 한다. 문제는 광장도 이 공격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면서 모든 참여는 개인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자발적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화를 스스로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광장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지속성을 잃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조직적으로 대변하고 이를 제도권 정치와 연결하기 위한 노력에 무심했기 때문이다. 혹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조차 결집된 목소리를 실질적인 정치적 성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정치적이라고 주저하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직화되지 않은 광장은 시민의 목소리를 공허한 외침으로 만들어버린다. 시민사회가 사익과 공익의 균형을 추구하는 의식 있는 시민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을 때, 한국 민주주의의 고질적 문제인 정치에 대한 시민의 혐오와 냉소는 심화될 뿐이다. 물론 시민의 조직화가 제도권 정치를 부정하거나 독자적인 시민 권력이 정부를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참여민주주의는 민의가 적극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안정적 기반 위에서 운영되고, 광장에서 표출되고 정리된 의견이 제도권 정치와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활성화될 때 실현된다. 시민사회를 시민단체들의 활동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시민사회는 다양한 목소리가 무질서하게 존재하는 정치 공간이다. 이러한 무질서를 제도화할 수 있는 역량을 시민사회가 갖춰야 하며, 이는 시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시민단체의 회원이 되거나 조직화하려는 노력을 할 때에 가능해진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단체가 이제는 시민들만을 바라봐야 한다.

 

시민들도 변해야 한다. 시민사회 조직화의 성패는 성찰적 시민의 존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진상이 득세하는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만나는 시민과 민주주의의 복원을 외치며 광화문의 정체성으로 연대한 시민은 다른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두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참여민주주의가 작동하는데 가장 큰 난관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는 시민성을 가진 시민들이 부재하고 공공정신의 미성숙으로 인해 자주 게임의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배타적인 이익갈등과 이기적인 집단행동으로 점철되고 있다고 지적은 뼈아프지만 사실이다. 팩스톤(Paxton)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의 성숙에 기여하는 것은 정치 참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동시에 향상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민성 수준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이 공동체 수준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저자

김석호_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국가통계위원회 위원.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논저로는 "The Quality of Civil Society and Participatory Democracy in ISSP Countries" (2016), "What Made Civic Dimension of National Identity More Important among Koreans?" (2015), "지방선거와 전국선거에서 한국인들은 다른 이유로 투표하는가? " (2015), 《통계를 통해서 본 광복 70년 한국사회의 변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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