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조세영_동서대학교 일본연구센터소장.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2011년 8월–2012년 7월)을 역임했고 주일본대사관, 주중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저서로는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2014), 《봉인을 떼려 하는가 :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2004) 등이 있다.

 

 


 

 

한일 정상회담은 제한적 협력관계 수준을 목표로

 

한일 정상회담 개최가 가시(可視) 거리에 들어왔다. 10월말 또는 11월초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의 기회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첫 번째 정상회담이 성사될 전망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2년 7개월만이며, 2012년 5월 13일 베이징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총리의 회담 이후 3년 5개월만의 한일 정상회담이 되는 셈이다.

 

1990년 이래 매년 1회 이상 개최되었던 한일 정상회담이 이렇게 장기간 개최되지 못한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특정 외교 현안이나 양국 정상의 개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한일 양국을 둘러싼 국제체제의 구조적 변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한일 간의 경제적 격차 축소, 중국과 일본의 국제적 비중 역전과 같은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한 두 차례의 정상회담으로 한일관계가 완전히 복원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한국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 없는 만큼 한일관계의 정상화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금년 들어 기시다 외상과 윤병세 외교장관이 처음으로 상대국을 방문하여 회담을 개최하고, 6월 22일 서울과 도쿄에서 개최된 국교정상화 50주년 리셉션에 양국 정상이 각각 참석하는 등 국면 전환을 모색하는 노력이 거듭되고 있으나 양국 정부 사이에 아직 충분한 신뢰관계가 조성되지 못한 상태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에서 강제징용의 표현을 두고 양측이 실무적으로 극심한 마찰을 겪은 것은 실무당국 사이의 신뢰관계가 매우 취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일관계를 전면적 협력관계로 복원시키기보다는 외교적으로 관리 가능한 제한적 협력관계의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정도를 목표로 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 문제의 중요성

 

중국의 급속한 국력신장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크게 변하고 있는 가운데 대외전략의 방향성에서 한일 양국 사이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앞으로의 한일관계에서는 과거사나 독도 문제에 못지않게 동아시아에서 조화롭고 안정된 지역질서가 형성되도록 서로 고민을 공유하고 협조를 모색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 문제를 포함하여 동아시아 지역질서에 관한 한국의 대외전략을 상위목표로서 먼저 구체화하고 나서, 이로부터 세부적인 대일정책을 연역적으로 도출해 내는 발상이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일관계의 종합적인 분석과 처방은 “동아시아 복합신질서 건축을 위한 한일의 공진(coevolution)”을 화두로 제시한 동아시아연구원의 특별보고서 “신시대를 위한 한일의 공동진화” 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동안 한일 정상회담의 의제 가운데 국제정세나 지역정세의 항목은 총론적 수준에 머물거나 북한 핵, 미사일 문제에 매몰되어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양자 외교현안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인식 문제에서는 4대 중요문서의 재확인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일관계의 경색은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적 언행에 큰 원인이 있었던 만큼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역사인식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인식 문제를 의제로 삼아 공방을 벌이거나 아베 총리의 발언 문안을 실무적으로 사전 협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인식만큼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난 8월 14일 발표된 아베담화에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미안한 마음으로 직시하려는 자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에서조차 한국을 너무 ‘냉대’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도 8•15 경축사에서 강경한 대응을 자제했지만,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에 비해 선명성이 크게 후퇴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지금 일본에서는 한국이 끝없이 되풀이해서 사죄를 요구한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따라서 아베 총리에게 새로운 반성과 사죄의 발언을 주문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우려된다. 그보다는 아베 총리가 “한일관계의 4대 중요문서의 내용을 견지한다”고 확언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한국의 요구는 추가적인 반성과 사죄가 아니라 일본이 이미 밝힌 입장과 어긋나는 언행을 삼가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싼 양국 정부 간의 소모적인 논쟁과 이로 인한 국민여론의 악화를 방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미 중국과 이러한 방식으로 중일관계의 기본원칙을 재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일관계의 4대 중요문서란 고노담화(1993), 무라야마담화(1995),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 선언(1998), 간담화(2010)를 말한다. 특히 한일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간 나오토(管直人) 총리가 2010년 8월 10일에 발표한 간담화는 “정치적 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라고 하면서, “식민지지배가 가져다 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라고 밝혔다.

 

비록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었다고 인정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일본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 가운데 가장 진전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간담화의 존재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한일관계의 개선방안에 관한 각종 제언에서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재확인 필요성은 언급되고 있지만 간담화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간담화에 대해서 아베 총리는 그 존재조차 입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거부감이 강하다. 자신의 보수적 역사관과 대척점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 정권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우연의 일치인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한일관계 주요문서 가운데 유독 간담화만 누락되어 있다. 혹시나 “간담화 지우기”를 원하는 아베 정권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간담화는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이므로 아베 정권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이를 계승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아베 총리가 4대 중요문서를 계승한다고 밝히는 것이야말로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공동선언은 균형 잡힌 패키지로

 

이번 정상회담에서 1998년의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업그레이드하여 새로운 공동선언을 발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일관계 전반을 조감하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공동선언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준비되어야 하는 만큼,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정상회담에 맞추어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좋지 않다. 또한 이러한 공동선언은 국제회의를 이용하여 개최되는 약식 정상회담보다는 상대국을 단독 방문하여 이루어지는 정식 정상회담에서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한일관계에 관한 공동선언을 준비한다면 양측의 입장이 균형 있게 반영된 패키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파트너십 공동선언에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와 함께 한국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발전과 국제사회 번영을 위한 공헌을 평가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함께 채택된 부속서(액션플랜)에 43개 항목의 협력사업을 망라함으로써 양측의 요구사항을 균형 있게 반영했다.

 

이러한 종합적인 공동선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실무당국의 치밀한 준비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 한일관계 속에서 공동선언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후속조치를 어떻게 추진해 나갈 것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실무당국의 관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2010년의 간담화는 한국 측에서 실무당국의 직접 관여가 제한된 채 비공식적인 정치채널을 통해 추진되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 내에 간담화 추진에 대한 제도화된 기억(institutional memory)이 결여되었고, 그 후의 대일정책에서 간담화 발표를 위해 일본 측이 기울였던 노력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간담화로 식민지지배를 진솔하게 반성하고 조선왕실 도서까지 반환했지만 한국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경대응뿐이었다는 불만이 남게 되었다. 일본 측의 반성과 사죄에 더하여 안보협력과 한일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 교섭 재개를 패키지로 삼았다면 훨씬 균형 잡힌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리적 일관성

 

과거사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어 있으나, 이번 정상회담에서 해결책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실무협상을 통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합의안이 나와야 한다(2015년 1월 12일 신년기자회견)고 강조하는 반면, 아베 총리는 “위안부에 대한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며 잘못된 이유로 일본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시정해야 한다”(2014년 12월 15일 이코노미스트 인터뷰)고 언급하고 있어서 한일 간에 너무 큰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회담 일정에 맞추어 무리하게 외교적 타협을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제에 못지않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문제다. 피해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보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의 대법원 판결이 최종 확정되어 한국 내 일본기업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실시되면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모두 한일 청구권협정의 해석으로부터 기인한 문제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 문서공개 관련 민관공동위원회가 발표한 보도자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반인도적 불법행위로서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입장인 반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무상 3억 달러의 청구권자금에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의 소재를 따지되 강제징용자 피해 보상은 일본에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국이 국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가 분명히 밝히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태도다. 이 점을 애매하게 내버려둔 채 외교적 봉합을 시도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해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일 양국의 정부와 기업이 공동 출자하는 2+2 형식의 재단 설립이 과거사 문제의 종합적인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의 하나로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청구권 협정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측이 이에 호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청구권 협정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한 후에 한국 기업과 함께 독자적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나서 후속 단계에서 일본 측이 자발적인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순이다.

 

고위급 안보정책협의회 설치와 한일 FTA 교섭 재개

 

일본이 지난 9월 집단적 자위권의 해금을 골자로 하는 안보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종래의 억제적 안보정책에서 크게 탈바꿈했다. 이는 한국의 안보정책에 일본이라는 중요한 변수가 새롭게 추가됨을 의미하며 안보 분야에서 한일 간의 실무적 대화의 필요성을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가 한국의 대북억지력 강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상호불신과 군비경쟁을 고조시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전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적 언행이 일본의 변화에 대한 주변국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양국 정부 간의 실무적 대화채널 확충에 합의하는 것도 일본의 새로운 안보정책의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현재 국장급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일 안보정책협의회를 격상하여 외교•국방 당국의 차관보급 이상이 참여하는 2+2 형태의 고위급 안보정책협의회 설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한일 FTA의 교섭 재개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간 한국 정부가 추진해온 거대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 FTA 추진 전략은 미국, EU, 중국과의 FTA 체결로 완성단계에 있으나 한일 FTA가 아직 미결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이 양자 차원의 FTA 허브 전략을 발 빠르게 추진하는 동안 뒤처져 있던 일본이 뒤늦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 Pacific Partnership: TPP) 참여를 결단하면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과 일본-EU FTA를 동시에 병행하는 ‘메가 FTA 허브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TPP 교섭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 동안의 공격적 FTA 추진으로 쌓아온 자신감이 퇴색하고 일본의 FTA 전략에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TPP가 일단 타결된 후 한국이 이에 추가로 가입하는 것은 자유화 수준이 매우 높은 한일 FTA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TPP 가입보다 먼저 양자 차원의 대등한 교섭을 통해 한일 FTA를 체결해 두는 것이 유리하다.

 

현재 TPP의 막바지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다. 내년에는 일본의 참의원 선거,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금년 중에 타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실상 TPP의 조기 타결은 물 건너가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하여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일 FTA 교섭 재개 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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