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Hyun Jung is an adjunct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General Education at Kookmin University.

 

 


 

 

북한이 3대 세습을 통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100일간의 추모기간을 거친 뒤 북한은 신속하게 김정은 체제로의 권력승계를 마무리했다. 지난 4월 11일 북한은 4차 당대표자회를 개최하고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당 제1비서 겸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이틀 뒤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를 열어 김정은 제1비서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된 데 이어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12월 29일 김정은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됐다. 이로써 북한에는 2인(김일성ᆞ김정일)의 ‘영원한 국가수반’이 존재하고, 당과 국가의 실질적인 수반은 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맡는 당 국가의 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4월 15일 김정은 제1비서는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태양절)을 맞아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군 열병식에서 첫 공개연설을 함으로써 ‘김정은 시대’의 공식 개막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당대표자회에서 열병식까지 일련의 정치행사는 북한 2세대의 지원 아래 3세대가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것은 단순히 세대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대내외노선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제 새로 등장한 김정은 체제가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가지고 있고, 향후 어떤 정책을 내놓을 지가 주목거리다.

 

군 통제 강화와 당 기능의 정상화

 

김정은 제1비서는 4월에 열린 제4차 당대표자회를 전후해 점진적인 세대교체와 함께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인사를 단행했다. 오극렬과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2세대의 노장층을 원로대접을 하면서도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2세대의 소장층을 대표하는 최용해 당 비서를 정치국 상무위원과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로써 북한군부의 3대 핵심조직인 총정치국(최용해 차수), 인민무력부(김정각 차수), 총참모부(이영호 차수)를 모두 2세대 소장층으로 채웠다.

 

특히 김정은 제1비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에 따라 군 출신이 아닌 최용해를 총정치국장에 임명해 군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를 강화했다. 최용해는 노동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돼 노동당의 의사결정과정에서도 김정은 제1비서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김정은 제1비서는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국장으로 손철주 상장을, 조직부장으로 이두성 중장을 임명하고, 70여 명을 새로 장성급으로 진급시키는 한편, 200여명의 장성급을 전역시키는 군부내의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이러한 군 인사를 통해 김정은은 당중앙군사위원장,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맡아 당중앙군사위원회→총정치국, 최고사령관→총참모장→각 군사령부, 국방위원회→인민무력부로 명령, 지시를 하달함으로써 군의 각급 조직을 통솔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체계는 김정은 시대에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김정일 시대보다 권위와 위상이 강화돼 군의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기구로 작동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북한이 군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를 구조화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둔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 제1비서는 2세대 소장층으로 분류되는 김경희와 장성택 부부를 당 비서와 정치국 위원으로 각각 승진시켰다. 고모인 김경희 비서의 보좌를 받아 당 비서국을 원활하게 운영하고, 국가안전보안부ᆞ최고검찰소ᆞ호위사령부 등을 당적으로 지도하는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통해 공안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존에 있었던 2010년 9월에 열린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이미 기본방향이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4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정위원ᆞ후보위원에 대한 인사는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 이후 1년 6개월 사이에 있었던 일부 간부들의 직책변동에 따른 보선 성격이 강했다.

 

안정적으로 권력승계를 마무리 한 김정은은 정치적 리더십 확보뿐 아니라 권력엘리트의 재편과 단합을 이끌면서 당ᆞ정ᆞ군의 핵심 실세들을 신속하게 장악했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은 적어도 권력정치 차원에서는 확고부동해 보인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약해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라든지, 집단주의체제로 갈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심지어 어린 나이로 권력승계 준비가 전혀 안 돼 김정은 체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김정일의 후광 속에서만 활동했지 단독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국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에도 김정일 체제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전망이 많았다. 짧으면 3일, 오래가도 3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300만 당원의 노동당을 주축으로 움직이는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을 분석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놓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첫째는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과정이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1994년 김일성 주석 급서 때와 달리 북한 내부에 유고(有故)대응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 건강에 이상이 나타난 직후 장성택ᆞ김경희 노동당 부장 등 북한의 ‘최고지도부’는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김정일의 유고사태에 대비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기록영화를 각 분야별로 새로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건강이 회복됐지만 거동이 불편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을 그대로 조선중앙TV에 내보내도록 했다. 2010년 10월 10일 당 창건 행사 때는 김정일 위원장이 절뚝거리며 입장하는 장면이 생중계 됐다. 불편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을 그대로 방송한 것은 과거 같았으면 관련자 모두 ‘숙청’될 만한 ‘사건’이었다. 적어도 일정 직위의 간부들은 시점만 몰랐을 뿐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에 대한 마음의 준비,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할 시점이 됐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사전에 암시한 셈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급서 때보다 김정일 사후에 북한의 충격이 덜했던 이유다.

 

둘째로 김정은이 예상외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시절부터 엄격한 후계자수업을 받았고, 2008년 후계자로 결정된 직후부터 군대와 국가사업에 깊숙이 관여하며 압축적으로 후계체제 구축에 힘써 왔다는 점이다. 지난 1월 8일 북한의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정은 제1비서에 대한 첫 기록영화에 따르면 김정은 제1비서는 ‘혁명활동’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시작했고, 대학 재학 시절 매일 3-4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또 기록영화는 김 제1비서가 군사대학 재학 당시 “지금 나에게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의 선군혁명위업을 군사적으로 믿음직하게 보좌해 나갈 수 있는 군사적 자질을 갖춰야 할 무거운 의무가 있다”며 “장군님의 군사전략 사상과 전술을 완전히 터득하자는 것이 나의 의지이고 목표”라고 말했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한 후 북한지도부가 김정은의 후계수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후계자로 낙점된 후 김정은은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 수행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2008년 겨울부터 이미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 동행하기 시작했고, 2009년에도 김정일 위원장의 강원도 원산지역 및 함경남도 함흥지역 현지지도 때 수행한 것이 확인된다. 2010년 김정일 위원장의 평양 개선청년공원 시찰에도 동행해 놀이시설을 타보며 놀이기구의 안전성을 직접 점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주목되는 사실은 2010년 초부터 김정은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북한 당국의 공식 문건이 10여 건이나 된다는 점이다. 이들 문건 중 대부분은 북 인민군 총정치국 문건이다. 적어도 2010년 시점에는 군대 내에 후계자의 ‘유일지도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상을 깨고 김정은이 전격적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2010년 9월 28일 당 대표자회를 통해 이미 김정은 중심으로 한 당과 국가 운영의 큰 틀이 결정됐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북한은 2009년 2월부터 국방위원회내각노동당 순으로 김정은 체제를 예비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우선 2009년 2월 북한은 김영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인민무력부장에 임명하고 이영호 평양방어사령관을 총참모장에 기용한 데 이어,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기용했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인원을 대폭 보강해 부위원장을 2명에서 3명으로, 위원을 4명에서 8명으로 각각 늘렸다. 11명의 부위원장과 국방위원에는 군 인사와 군 내 당조직을 관할하는 인사가 두루 망라됐다. 군사ᆞ군수ᆞ당조직 등 인민군의 주요 부서 책임자가 모두 국방위원회에 배치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명실상부하게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 관리하는’ 국가 기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김정은 후계체제를 군대 내에 뿌리내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김정은 후계구도를 염두에 두고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후견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국방위원회 개편을 마친 북한은 다음 수순으로 내각을 개편했다. 2010년 6월 7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2기 3차 회의를 열어 새 총리에 최영림을 임명하는 등 내각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4월에 최고인민회의가 열린 뒤 2개월만이었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각 인사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총리 교체와 부총리의 대폭 보강이었다.

 

내각 인사에서는 최영림ᆞ전하철 등 김일성 주석 서기실의 책임서기 출신이 각각 총리와 부총리에 임명된 것, 도당책임비서 출신들이 다수 부총리에 기용된 것이 주목된다. 경제 재건을 책임진 내각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이고, 흐트러진 지방 민심을 제대로 읽고 반영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경험이 많은 원로들을 등용해 후계체제를 보좌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국방위원회와 내각에 대한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한 김정일 위원장은 2010년 9월 28일 전격적으로 제3차 당대표자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김정은 후계자를 공식 석상에 내세웠다.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만에 ‘당 전체회의’로 열린 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향후 김정은 체제를 이끌 인맥으로 노동당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사실상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10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 후계자를 동행하고 중국을 방문해 북중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1970년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할 때는 당내에서 후계자로 확정된 뒤 3년 동안 당ᆞ정ᆞ군에 후계체제를 수립하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에야 노동당 6차 당대회를 통해 공식석상에 등장했다. 이에 비해 김정은 부위원장은 2008년에 후계자로 내정됐고, 2년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년 만에 압축적으로 후계체제를 수립한 셈이다.

 

제3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북한의 최고 실세기구로 급부상했다. 부위원장직이 신설되고, 부위원장에 후계자 김정은과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 선출됐다.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도 군 최고실세들이 보강됐다. 국방위원회에 원로들이 주로 포진했다면 당 중앙군사위에 보강된 인물들은 인민군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2-3세대들이 주류를 이뤘다.

 

특히 2010년 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의 공식 등장과 함께 부상한 인물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일빨치산의 2세대 중 상대적으로 젊은층이 김정은 시대의 중심간부로 급부상했다.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 최용해 비서,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 오일정 당 민방위부장 등이 대표적이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항일빨치산 2세, 3세대들이 김정은 후계체제를 떠받치는 첨병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지도부는 길게는 2000년대 초 김정은의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입학 때부터, 짧게는 2008년 후계자로 결정한 뒤부터 치밀하게 후계체제 구축에 공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은 2008년 8월 건강이상 이후 김정은으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란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ᆞ정ᆞ군에 대한 운영을 후계자에게 맡긴 채 지방 현지지도에 몰두했던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다는 의미다. 후계체제를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일성 사망과 후계자 권력승계를 직접 경험해봤고 스스로 수령제 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본 사람으로서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정치 차원에서 챙겨야 할 차기 권력구조를 사전에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2010년의 3차 당대표자회, 2012년 4월의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드러났듯이 김정은 시대의 권력구조는 집단지도체제보다 김정은 제1비서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귀결됐다. 권력분산을 통해 ‘특정인’을 내세워 섭정을 하거나 후견인으로 부상시키기보다는 ‘집단 협의’를 거쳐 조직적으로 새로운 최고지도자를 보좌하는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 당대표자회를 개최해 당중앙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고, 당중앙군사위원회를 확대개편해 노동당 운영을 정상화한 것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단기적으로 김정은 체제가 흔들리거나 내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이 2011년 1월에 발표한 ‘국가경제개발 10개년전략계획’의 성과여부가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에 중요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김정은 시대의 정책방향

 

김정은의 후계체제 구축 및 등장과정은 새로운 지도자에 맞는 새로운 정책 방향 수립과 맞물려 진행됐다. 김정은 제1비서가 내놓을 정책방향은 이미 내부논쟁을 거쳐 확정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09년 5월 2차 핵실험 이후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 개최 전까지 내부적으로 대내외 정책기조를 두고 상당한 논의가 진행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학자들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논의내용은 ▲동북아에서 G2로 부상한 중국과의 관계 설정문제, ▲계획과 시장의 조화, 자립경제와 경제특구 확대 문제, ▲6자회담와 평화협정 문제, ▲남북관계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있었다. 해당 주제를 담당하는 당과 내각의 정책담당자가 폭넓게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중국과의 관계 설정문제는 큰 논란 없이 방향이 결정됐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대북 유엔제재에 동참했던 중국이 2009년 7월 당내 논의를 거쳐 북에 대한 전면적인 ‘포용정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그 해 말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이 그 시발점이었다. 북한은 1991년 남북의 유엔동시가입 때 시간을 늦춰달라는 김일성 주석의 부탁을 중국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에 대대적인 식량지원을 하지 않은 점 등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중국과의 교류가 대단히 중요해진 점, 후계체제를 안정화시키는데 중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 중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 ‘중국식 경제모델’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젊은 세대의 요구 등을 고려해 중국과의 ‘전면적인 협력체제 구축’으로 결론이 났다. 그것이 2010년과 2011년 세 차례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으로 가시화됐다.

 

둘째, 계획과 시장의 조화, 자립경제와 경제특구 확대 문제에 대해서는 강온파간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절충적인 결론이 나왔다. 2009년 6월 김정일 위원장은 “전체 인민이 강성대국건설을 위한 새로운 대고조에서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력을 높이 발휘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6ᆞ25담화’를 내놓았다. 이 담화의 핵심은 북한이 자력갱생노선을 고수하면서 계획경제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 해 11월 말 북한은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와 반대로 김정일 위원장은 2009년 9월 초 내각 무역성과 대외사업기관 주요 간부를 대상으로 대외 무역 확대와 해외 자본 유치를 촉구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자본 유치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선시와 남포시를 특별시로 지정해 경제특구로 조성하도록 했다. 외자 유치와 합영, 합작 등 외국과 관련된 모든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국가적 중앙지도기관으로 조선합영투자위원회와 조선대풍국제그룹도 조직했다. 대내적으로 시장을 통제하고 계획경제를 복원하면서 제한적으로 대외개방에 나서겠다는 이중적인 정책결정이었다.

 

셋째, 북은 2차 핵실험 이후 6자회담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됐다고 결론 내렸다. 2009년 7월 북한은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평화협정 논의가 수반되지 않는 6자회담에는 복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2010년 1월 북한은 “비핵화에 관한 전략적 결단이 없이 평화협정 회담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평화협정 문제가 논의된다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러한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는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비핵화 과정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선(先)비핵화 후(後)평화협정 논의’원칙을 고수하는 미국과 한국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결정이었다.

 

2009년 12월 20일 방북중인 미국의 빌 리처드슨 주지사에게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포괄적인 대외전략’을 언급했다. 이것의 핵심은 북미관계정상화를 대외노선의 중심으로 설정했던 것에서 벗어나 북미ᆞ남북ᆞ북일 대화를 병행해서 전방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 대북전문가는 “북한은 지난해 향후 경제노선, 대남노선, 대외노선과 관련해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이 취했던 노선으로 돌아가 이를 김정은 후계자시대의 기본 방침으로 확정했다”라고 밝혔다. 김정은 후계자 등장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이 ‘1990년대 초 김일성 주석의 노선’을 언급한 만큼 당시 북의 움직임은 향후 김정은의 행보를 예측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즉 1990년대 초 걸어온 길을 통해 볼 때 북한은 남북ᆞ북미ᆞ북일관계를 동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대화공세로 나오면서 내부적으로 농업과 경공업 발전을 강조하고, 대외무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넷째, 남북관계 문제는 내부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벌인 주제였다. 이른바 ‘대화파’와 ‘강경파’가 팽팽히 맞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대화기조는 유지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강력하게 대응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결과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 관광 회담 제안,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평도 포격 같은 대남도발이 터져 나왔다. 그 후에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접촉, 상호 비밀특사교환 등 남북대화를 위한 모색은 이어졌고, 지난해 2차례 남북비핵화회담이 열린 것에 알 수 있듯이 북한의 대남 대화기조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2012년 이명박 정부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올해 남북대화가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선군노선 계승 표방하며 대외개방 준비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3년 기간에 결정되고 추진된 북한의 정책들은 사실상 김정은 시대를 예비하는 정책 전환이었고, 김정은 체제 출범과 함께 그대로 이어졌다. 이것은 제4차 당대표자회 직후인 4월 15일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 참석해 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첫 공개연설에서 잘 드러났다. 첫 대중연설에서 김정은 제1비서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 업적들을 강조한 뒤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께서 펼쳐주신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 길을 따라 곧바로 나가는 여기에 우리 혁명의 100년 대계의 전략이 있고 종국적 승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이란 표현은 김정은 제1비서가 후계자로 결정된 후 항상 강조해온 것이라고 한다.

 

향후 ‘사회주의의 길’에 대해 김정은 제1비서는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력에 새 세기 산업혁명을 더하면 그것은 곧 사회주의 강성국가”라며 “우리는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 함남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려 경제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라고 당면과제를 제시했다. 김일성 시대의 ‘자주’과 김정일 시대의 ‘선군’의 기치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사회주의 강성국가’건설을 위해 제한적이나마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 것이다.

 

김정은 제1비서는 김일성ᆞ김정일 시대와 차별화 하는 비전으로 ‘새 세기 산업혁명’을 제시했다. 북한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서 새 세기 산업혁명에 대해 “최첨단 돌파전으로 우리 식의 지식경제강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이며, 우리 당이 내세운 사회주의건설의 웅대한 전략적 노선”이라고 규정했다. ‘자주’와 ‘선군’을 계승하면서도 김정은 시대의 핵심어로 ‘지식경제’를 표방한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 시대는 시대의 발전과 환경의 변화, 3-4세대의 등장으로 새로운 사고와 구상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휴대전화 보급대수 100만대 돌파로 상징되는 ‘통신혁명’, 대형 슈퍼마켓과 전문 상점의 등장으로 상징되는 ‘유통혁명’은 김정은 제1비서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3세대가 변화된 환경과 요구에 부응하려는 새로운 시도인 셈이다. 더구나 1990년대 후반 북한의 3-4세대들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혹독한 경제난을 경험한 만큼 경제부흥에 대한 열망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각 상급(장관급) 인사들의 교체가 활발한 것도 젊은 경제관료의 부상을 뜻하며 경제관리개선의 필요성에 따른 전문성과 능력이 고려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김정은 제1비서는 첫 연설에서 “우리가 선군조선의 존엄을 만대에 빛내이고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위업을 성과적으로 실현하자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인민군대를 백방으로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선군사상을 강조했다. 선군노선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이러한 발언과 북한의 로켓 발사 등을 거론하며 김정은 시대에도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선군노선을 포기해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북한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자주’와 ‘선군’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지식경제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김정은 시대의 정책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김정은 제1비서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3세대 구상대로 ‘지식경제강국’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정세가 안정돼야 한다. 김정은 제1비서도 첫 연설에서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총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에 있어서 평화는 더없이 귀중하다”라며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그는 “우리에게는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이 더 귀중하다”라고 발언해 북한의 자주권 보장을 전제로 제시했다. 이러한 발언은 지난 3월 초 미국을 방문해 한 북한 이용호 외무성 부상의 발언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는 미국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우리의 새 지도자는 미국과의 다툼을 원치 않는다”며 “미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핵우산을 제공하면 당장이라도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해 주목을 받았다.

 

김정은 제1비서는 또한 “진정으로 나라의 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평화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손잡고 나갈 것이며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책임적이고도 인내성 있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발언해 한국의 정권 변화 후 남북대화에 나설 의사를 드러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미국의 정책변화와 한국의 정권 교체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미국과 한국의 정책 변화를 기다리며 내부적으로 김정은 체제를 공고히 하고, 새로운 경제개혁노선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009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친필 명제’를 남겼고, 올해 공동사설은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을 따라 나라의 경제면모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하며 과학자ᆞ기술자들에게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촉구했다. 눈은 세계를 보라는 것은 경제와 과학기술에서 세계의 흐름을 적극 배우고, 좋은 점을 도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국식이든 일본이나 러시아 방식이든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좋은 점을 적극 도입하라’고 했다는 김정은 제1비서의 지시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 제1비서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3-4세대가 적극적으로 대내 경제개선과 경제특구 중심의 대외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유훈을 남긴 셈이다. ‘지식경제’를 키워드로 제시한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과 제안을 들고 나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다만 인민생활 개선 등을 강조하고 민생행보를 강화하면서 김정일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리더십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대외노선에서도 미국과 한국에서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는 2013년부터는 유연한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 재건과 외자유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지속가능한 대북정책’ 마련할 시점

 

한국과 미국 정부는 대북압박보다 김정은 시대의 개선ᆞ개방노선이 본격화될 때까지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등 6자회담 관련국들이 대부분 올 하반기에 정권교체기에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해 북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우선 미국 행정부는 북한의 우라늄농축과 경수로 건설을 동결시키기 위해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핵활동 중단을 명기한 ‘2.29합의’ 이행을 모색하기 위한 북미접촉에 나서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포기하고, 긴장완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할 경우 국제공조를 통한 대북압박으로 핵실험을 막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6자회담 재개를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단 북한의 핵 활동을 중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4년 간 미국과 이명박 정부가 대북 제재와 ‘전략적 인내’를 내세웠지만 돌아온 것은 북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향상이었다는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대화 없는 제재만으로는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입증됐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이 핵실험을 포기할 경우 김정은 제1비서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고위급접촉을 시도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북한의 새로운 권력에 기회를 제공해 북한의 정책 변화를 유도해 보는 것이다. 이미 북한의 초청을 받은 존 케리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의 방북도 하나의 카드가 될 수 있다. 지난 3월 초 미국을 방문한 북한 이용호 외무성 부상은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을 공식 초청했고, 케리 외교위원장도 ‘적절한 시점’에서 방북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특히 장기적으로 북한의 핵와 미사일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추진된 ‘페리프로세스’와 유사한 대북접근법이 마련돼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셋째,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2013년에 새롭게 출범할 차기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초보적이나마 남북대화의 통로를 열어야 한다. 하반기에 이산가족상봉을 다시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남북대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일단 6자회담 재개 쪽으로 방향을 잡고, 6자회담 내에서 남북비핵화회담을 여는 방안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2013년에 들어설 한국의 새로운 정부는 남남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국민적 여론을 수렴해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지속가능한 대북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북핵문제 해결을 통한 한반도비핵화는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처럼 남북 정상회담 비밀접촉과 대북 제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여서는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평화를 담보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가장 긴요한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등 남북의 긴장고조를 막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차기 정부는 남북경협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통해 남북대화를 복원함으로써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선순환구조로 동시에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인민생활 향상을 총적 목표’로 제시한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핵보다 경제협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김정은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대외 강경노선을 보였지만 승계과정을 안정적으로 마친 북한이 내년부터는 대화공세로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에 여당의 재집권이 이뤄지든,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든 남북관계에서 화두는 남북정상회담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 제1비서가 첫 연설에서 “누구든지 손잡고 나갈 것”이라고 표방해 대화의지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2013년에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남북의 신뢰구축과 북핵 및 평화공존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다. ■ 

 

 


 

 

Acknowledgement

The author appreciates Chaesung Chun and Jung Chul Lee for helpfu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