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역대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 조사에서 박정희와 노무현이 오차범위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 있는 일이다. 시대를 초월한 대한민국의 지도자, 박정희 신드롬에 균열이 가는 것일까?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박정희·노무현(사진) 두 전직 대통령은 비슷하지만, 산업사회·권위주의 vs 정보사회·탈권위주의라는 점에서 상반된 시대 가치를 대변한다.

 

“민주화 세력이 그토록 애를 썼지만 결국 이명박이 해냈다.” 최근 발표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박정희 신화’를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의 재림을 꿈꾸던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라는 얘기였다.

 

6월17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 조사에서 박정희 38.1%, 노무현 36.0%, 김대중 10.7%, 이승만 3.6%, 전두환 3.2%, 김영삼 1.4%, 노태우 0.6% 순으로 나타났다(전화조사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 수준에서 ±3.1%포인트).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천·경기, 광주·전라, 여성, 20·30대, 반한나라당 지지층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앞질렀다.

 

처음이었다. 역대 대통령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박정희의 아성은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업적 평가든, 호감도든 압도적 1위를 달렸다. 그 뒤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쫓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 시대의 아이콘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 시대의 상징으로 남북 관계 개선이나 민주주의 진전 따위 업적이 부각되면서 ‘박정희 대 김대중’ 대결 구도를 형성해왔다. 그런데 이런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결 구도가 깨지면서 양자 모두를 극복하려 했던 ‘노무현’이 등장한 것이다. KSOI 측은 “무엇보다도 지난달 서거로 인한 추모 및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맞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아닌 ‘노무현 개인’에 대한 평가는 차이가 있고, 또 울분과 충격의 서거정국 여진을 감안한다면 차후 지지율이 조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일까? 한발 더 나아가 보자. 지도자상에 대한 시대적 관점이 달라진 건 아닐까?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산업화 패러다임이 붕괴된 것은 아닐까? 김헌태 전 KSOI 소장(인하대 언론정보학과 겸임교수)의 말이다.

 

“박정희 리더십의 핵심은 고도성장과 권위주의였다. 산업화 시대 초기, 풍요를 대가로 박정희의 권위주의 통치가 용인될 수 있었지만 지금 이명박 정권은 성장은 없고 권위주의만 남았다. 더 이상 박정희 모델이 재연될 수 없는 시대라는 걸 대중이 깨달은 거다. 박정희식 가치와 향수는 단절·종료되는 반면 노무현식 가치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달라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지난 대선은 민주 정부 10년에 대한 심판 성격이 훨씬 강했다. ‘잃어버린 10년’,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등의 회고적 프레임이 먹혔다. 대중은 빈곤 탈출의 비상구로 ‘경제 살리는 대통령’ 이명박 후보에게 묻지 마식 지지를 보냈다. 정책 경쟁도 도덕성 검증도 무사통과였다.

 

그 저변에 깔린 건 박정희 향수였다. 민주 세력들은 ‘친일’ ‘독재’ ‘개발주의’를 내세워 박정희 신드롬을 깨려 했지만 공허했다. 이명박 후보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며 박정희의 외모까지도 흉내내려 했고, 박근혜 후보는 외모가 아니라 속을 닮는 게 중요하다며 박정희의 적자임을 드러냈다. 하지만 박정희의 정치적 혈통은 이명박이 계승했다. 박근혜가 박정희 향수를 단순 소비하는 쪽이었다면, 이명박은 박정희 시대가 다시 도래할 거라는 기대감을 충족시켰다. 샐러리맨에서 CEO까지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그 자체가 박정희 시대의 응집이었다. 수도권·중산층이 이명박으로 돌아선 이유이기도 했다. 매년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7대 강국 진입! 하지만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은 무참히 깨졌다.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박정희(사진)·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비슷하지만, 산업사회·권위주의 vs 정보사회·탈권위주의라는 점에서 상반된 시대 가치를 대변한다.

 

집권 첫해 대형 악재가 잇따르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쳤지만 그래도 ‘앞으로 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과반을 넘었다. 지난해 8월, 촛불 정국 직후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9월 글로벌 경제 위기가 터지고 연말에 이르자 처음으로 ‘기대하지 않는다’(45.4%)는 응답이 ‘기대한다’(40.8%)는 응답을 앞지르는 결과가 나왔다. 12월 초 KSOI 조사에서였다. 한귀영 연구실장은 “대통령 지지도보다 기대감 하락이 더 심각하다. 대통령이 어떤 정책수단을 쓰더라도 반응하지 않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2~3월 취임 1주년을 즈음해 기대감이 회복되는 듯한 여론조사들이 발표되었지만 전문가들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집권 1년차 정권에서 나타나는 의례적인 기대감, 다시 말해 ‘일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당위적 차원이라는 얘기다. 단적으로 4월 재·보선에서 드러났다. 여당의 평상시 지지율은 야당보다 높았지만 선거 결과는 완패였다. 투표로 동원되지 않는 기대요, 지지였다.

 

대안의 부재, 죽은 자들의 대결

 

아울러 ‘여론 담론’의 정권 교체도 이뤄졌다. 이명박 시대를 관통한 경제성장론은 서서히 힘을 잃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최우선 국정 과제를 물었을 때 ‘경제성장’이라는 답변은 2008년 2월, 2009년 2월, 2009년 6월 조사에서 각각 32.8%→26.6% →19.3%로 줄어든 반면, ‘국민통합’이라는 응답은 각각 6.3%→13.9%→28.3%로 늘어나면서 1위로 뛰어올랐다. 다른 조사 결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극화 해소, 민주주의, 신뢰, 소통, 통합 등 ‘내적 가치’가 높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김헌태 전 소장은 “이명박 시대의 대중은 지금이라도 권위주의 시대가 재래할 수 있다는 역리를 경험하고 있던 차,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이다. 이명박의 권위주의 통치, 그 정점에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노무현으로 돌아서게 된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 이 같은 흐름이라면 반이명박 반사이익을 누리는 박근혜 의원의 입지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대중이 더 이상 박정희 신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아버지 시대의 유산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박 의원에게는 이명박 대통령이 처한 고도성장 없는 시대에 대한 답을 내놔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다음 대선은 죽은 자들의 대결이 될 수 있다. 그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박정희·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거론했다. 미래가 부재한 상태에서 현실은 복고주의로 흐른다. 퇴행이다. 박정희를 넘어서기 위해 ‘죽은 노무현+알파’가 필요한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