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는 한국의 민주화 진전에 따른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2002년 대통령의 성공조건, 2007년 대통령직 인수의 성공조건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민주화 이후 바람직한 대통령의 역할, 권한, 책임에 관한 제도화 방안을 강구해 왔다. 이제는 SNS기술 확산에 따른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 증대하는 정치참여와 소통 요구를 안정적 제도로 담아내려는 요구가 시급하다.
이에 EAI는 지난 정부들의 국정운영의 성과와 방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정치환경에 부합하는 거버너빌리티(governability) 형성과 성공적인 대통령직 수행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2013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기획하였다.
2012년 5월 11일에는 문민정부에서 4년 가까지 정무수석비서관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한 이원종 전 수석을 초빙하여 제4차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하였다. 회의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시대적 소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 임기 5년의 효과는 다른 나라의 20년과 마찬가지이다. 임기 5년의 국정수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세계 수준의 변화에 대응하여 앞서갈 수도 혹은 크게 뒤처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틀에서 보면 그 동한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나름대로 중요한 “시대적 소명”을 적절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소명을,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 소명을,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붕괴에 따른 국가 불안을 안정화하는 소명을,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의 소명을 이루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30년 동안의 군사 문화와 가치를 정리하고 새로운 문민화 가치를 도입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남북간 평화공존과 통일논의를 진전시켰으며, 노무현 정부는 탈권위주의 리더십을 통해 참여민주주의시대의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한 것 같다. 시대적 흐름을 적시하고 ‘경제대통령’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지만, 어떤 소명을 가지고 대통령직을 수행해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기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은 무엇일까? 이를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포퓰리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소명의식’은 성공한 대통령을 위한 중요한 필수조건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역사의식과 비전을 가지고 세계의 변화를 내다볼 수 있는 준비된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시대적 소명을 구현해 갈 수 있도록 국민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국민의 정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의 ‘한의 정서’이고 다른 하나는 ‘신명의 정서’이다. 한의 정서를 통해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이것만으로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 이제는 정치가 국민을 신명 나게 해야 한다. 거버넌스 시대 리더십의 핵심은 바로 탁월한 다중(多衆)이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공적인 대통령을 위해서는 정치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성공적인 대통령을 위해서는 개인적 요인 이나 대통령직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정치환경과 사회문화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활발한 사회적 담론을 통해 만들고 현실에 맞추어 수정 보완해 나가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민주적인 정당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 정당의 후진성은 사람중심의 정당이라는데 있다. 이념적 대중정당이 없다. 그리고 국민정당을 표방하지만 여전히 지역정당의 틀에 갇혀 있다. 정당의 이념이나 정책이 따로 없기 때문에 정당을 대표하는 인물의 목표와 비전이 당의 목표와 비전이 된다. 이러한 사람 중심의 정당지지 문제는 특정 인물을 지지할 경우 정책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지지하고 인물을 반대하면 그 정책 또한 무조건 반대하는 퇴행적 정치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성공적인 대통령이 나오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정당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면 시민단체나 다른 사람에게 정치의 역할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슈지향적인 포괄적 정당, 국민의 정당(people’s party)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시계추처럼 균형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좌든 우든 한 쪽으로 가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쪽으로 옮겨 균형을 맞추면서 발전해 가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의 변화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소통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상대를 인식하기도 인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당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분명해 지고, 단순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사적 지지와도 분리될 수 있다. 그에 따라 정당의 책임성이 강화될 수 있다. 그리고 정당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천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국민이 아닌 정당 유력인물만 쳐다 보도록 만드는 하향식 공천제 대신 실질적인 상향식 공천제를 실천해야 한다. 진정한 국민의 정당으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역선택이 불가능한 진정한 오픈 프라이머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민주적 정당과 정치환경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성공적인 대통령이 가능할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정무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청와대는 국정운영의 중심이자 중추신경이기 때문에 비서실의 역할과 기능이 어떠하냐에 따라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가 영향을 받게 된다. 기본적으로 청와대 조직체계는 대통령의 정치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실을 비서실과 정책실로 분리하는 이원구조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원구조는 대통령의 효율적인 국정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사실상 정무행위이며 정책행위는 정무에 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공적 대통령을 위한 비서실의 역할은 무엇인가? 원칙적으로 비서실은 대통령의 비전과 정치철학을 내각에 잘 전달하도록 하고, 장관들이 자기분야에서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충실히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정부정책이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맞는지 여부를 모니터링 하는 기능도 중요하다. 또한 그것을 대통령이 숙지하도록 일러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하지만 청와대가 모든 것을 다하려 들어 내각이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비서실은 권력실이 아니며, 비서실의 임무는 말 그대로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다. 비서진이나 보좌진은 자신의 이념이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청와대의 내부관리는 수석회의를 통해 대통령의 정치철학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역대 정부의 사례는 이러한 원칙들이 지키지 않을 때 대통령의 실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정당 및 국회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성공적 국정수행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여당과의 협력적 동반자 관계가 구축되지 않으면 현재의 권력구조 하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제왕적 대통령’은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집권당을 통해 국회를 장악했을 때의 일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여당의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하면 ‘식물대통령’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정무기능을 통해 여당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으로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청와대의 적절한 역할 설정이 필요하다. 야당과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여당이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청와대가 직접 전면에 나서는 것은 문제다. DJ 이후 청와대가 야당의 공격에 직접 맞서 나서면서 여당의 정무기능은 사실상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여당이 국정의 책임을 공유하기 보다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과 청와대에 책임을 전가하게 된 것이다. 정무기능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은 무한책임의 정치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본격적인 거버넌스의 시대이다. YS나 DJ까지 유효했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조정과 통합을 위한 정치적 역량이 필요하다. 정치의 최종목표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결국 다원화된 권력과 다기화된 이해관계를 어떻게 잘 엮어내느냐가 리더십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이 출범하는 정권은 모두 기존 정부나 체제의 결함에 대한 개혁을 약속한다. 하지만 개혁의 성과를 거두기란 쉽지가 않다. 개혁은 수혜를 받는 다수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반면에 손해를 보는 소수의 기득권층은 강력하게 반발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집권 초반 대통령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추진이 용이하지만 점차 인기는 하락하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엮이게 됨으로써 개혁의 동력이 떨어지게 진다. 따라서 개혁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조정과 통합을 위한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이 관건이 된다.
관료와의 관계에서도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의존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유능하지만 배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관료의 협조가 성공적 국정운영에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이를 쉽게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료를 단순히 ‘개혁의 대상’이나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문제가 있더라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관료적 저항을 극복하는 것은 대통령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 내각에 맡기고 내각 책임자를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적절한 권한위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책임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대통령이 모두 져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총리에게 국정운영의 전권을 위임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책임은 반드시 대통령이 져야만 한다. 권위주의적 정부에서처럼 총리가 책임회피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책임 없는 권력은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측근비리의 문제도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은 대부분 정책실패보다는 측근비리에서 비롯되었다. 대통령의 측근비리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나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비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모두 단순하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은 최고의 자원이기 때문에 대통령 측근에는 항상 비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친인척이나 측근에 의한 국정농락이나 권력비리의 발생은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임행위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와 1987년 통일민주당 총재 공보특보를 지냈고, 1993년 공보처 차관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였다. 문민정부에서 4년여 동안 정무수석을 지내면서 대통령 보좌역할에만 성실히 수행한 ‘그림자 참모’로 유명하다. 현재는 사단법인 우리누리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인하대, 명지대 초빙교수 및 한양대 석좌교수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사회자 이숙종, EAI 원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참석자 김 정, EAI 사무국장 이곤수, EAI 거버넌스연구팀 팀장 이재열, 서울대학교 교수 장용석, 연세대학교 교수 정원칠, EAI 여론분석센터 선임연구원 정한울,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 한규섭, 서울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