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연구원은 한국 외교의 미래 비전으로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견국 외교는 국력기준에 의해 중견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외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외정책의 특징에 의해 좁은 의미의 국익과 더불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외교, 그리고 지역적•지구적 차원의 아키텍처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외교를 일컫는다. 중견국 외교는 미중간 세력균형 변화에 따라 증대되는 지역 불안정성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한국 외교의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본 연구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연구원은 2013년 8월 19일 에드문도 후지타(Edmundo Sussumu Fujita) 주한브라질대사를 초청하여 “브라질의 외교전략과 한국의 중견국 외교에 대한 제언”을 주제로 제3회 주한외국대사 초청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였다. 후지타 대사는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브라질의 외교전략 원칙에 대해 발표하였고 이어서 토론자들과 한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제언을 중심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주요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브라질의 경험

 

브라질 외교의 역사는 1808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나폴레옹의 침입을 피해 브라질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앙(Dom João) 섭정왕자(Prince Regent of Portugal; 1816년 즉위하여 주앙 6세가 되기 전 직위)는 브라질에 당도하여 법무부(Ministry of Justice)와 국방외교부(Ministry of Defense and Foreign Affairs)를 설립하였고 포르투갈의 외교정책을 이 국방외교부를 통해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브라질의 외교가 식민지 차원을 넘어 군주국 수준으로 격상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브라질은 1822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입헌군주정을 수립하였고, 이때부터 외교부는 국방부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브라질 외교는 이웃 국가들과 평화적으로 국경선을 확정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브라질 외교사의 입지전적인 인물 리우 브랑코(Rio Branco)가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브라질 외교관을 양성하는 리우 브랑코 연수원(Rio Branco Institute)은 그의 이름을 따서 수립되었다.

 

브라질은 이웃 국가들과의 중요 국경선 분쟁을 20세기 초까지 협상을 통해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이로써 주변국과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대외 안보위협요인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오늘날까지 브라질이 군사력 증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브라질의 국방비 지출은 세계 11위로 높은 편이나, 상당부분 퇴직 군인들의 연금 지불을 위한 것이다. 브라질은 1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다. 장비 역시 매우 노후화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준의 무기체계가 여전히 브라질 국방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브라질에서 군의 역할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국민들의 복지증진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아마존 지역과 같이 정부가 직접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에 군이 배치되어 학교나 병원과 같은 시설을 짓고 사회인프라를 제공한다.

 

식민지 경험은 오늘날 브라질 사회가 가진 독특한 복합성을 형성하게 되는 주요 요인을 제공하였다.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과 토착주민들의 피가 섞이게 되고, 포르투갈인과 함께 들어온 노예들로 인해 인종 구성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더하여 19세기부터 이미 여러 국가들로부터 이민을 수용하게 되면서 유럽뿐 아니라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등으로부터 수많은 인종이 브라질로 유입되었다. 현재 브라질인들 가운데 순수하게 하나의 인종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브라질 사회는 다인종•다문화가 함께 녹아있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으며 다른 문화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특성을 보인다.

 

브라질의 외교전략

 

브리질 외교의 기본 원칙은 1963년 제18차 유엔총회(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에서 브라질 외교장관 카스트로(Araujo Castro)가 발표한 “3D” (development, disarmament, decolonization) 연설에 축약되어 있다. 브라질 외교는 국제사회 공영,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로운 문제해결, 평등한 국가관계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브라질은 모든 국가가 자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이 권한은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일례로 대량살상무기 문제에서 브라질은 핵무기 개발은 제한되어야 하지만 원자력 발전 분야에서 평화적인 과학기술의 발전 추구 권리는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안보위협이 될 수 있다 해서 발전을 위한 평화적 과학 연구가 제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원문제의 경우에도 자원의 채취, 국제적 거래, 자원 활용 기술개발 등에 있어 생산국과 소비국 사이의 협력을 통한 공영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오고 있다.

 

브라질이 강조하는 평화적 문제해결의 원칙은 국경분쟁을 반드시 국제법 또는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고 절대로 무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해온 것에서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브라질 스스로 이웃 국가와의 국경선 문제를 협상에 의해 처리하는 모범을 보였다.

 

국제사회에서 주권 평등의 원칙은 1907년 2차 헤이그 평화회의 때부터 브라질이 지켜온 중요한 원칙이다. 모든 국가들은 국력의 크기와 무관하게 주권을 소유하고 있고, 주권간에 위계성은 존재할 수 없다. 브라질은 민주적인 국제사회를 수립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브라질이 스스로 지역 패권국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패권의 개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외교 원칙과 가치에서 기인한다.

 

브라질은 유연한 외교를 추구한다. 다른 국가와 군사동맹이나 이념동맹을 맺은 적이 없고, 비동맹운동(Non Aligned Movement: NAM)에도 참관국(observer) 자격으로 참여했을 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현재 브릭스(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BRICs)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경제적인 요소만을 고려한 것으로 문화나 국가정체성을 공유하는 연대그룹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브릭스가 종종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유사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익의 차원에서 협력하기 때문이며 그 이상의 연대를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유연한 브라질 외교는 앞서 설명한 브라질 사회의 다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여러 가치를 품을 수 있는 여지가 다른 사회보다 훨씬 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전 단계에 있어서도 브라질 사회는 선진적인 영역, 개발도상중인 영역, 매우 부진한 영역이 혼재되어 있는 복잡한 측면이 있다. 이는 여러 발전 단계에 속해있는 다른 국가들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1992년 리우 회의(Rio Summit)에서 “리우 선언”과 “의제 21”(Agenda 21)을 채택하고, “지구 온난화 방지 협약” 등 중요한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브라질이 유연한 외교를 바탕으로 국가들 사이에서 “합의 구축자”(consensus-builder)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외교에 대한 제언

 

1. 국제관계의 위계성을 가정한 논의가 가지는 한계에 유의하고, 중견국 외교와 같은 개념 보다는 지구적 문제해결 차원에서 외교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주권 평등성을 강조하는 브라질은 원칙적으로 국가들 사이의 위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브라질은 지역패권이나 강대국화를 추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대국, 약소국, 중견국과 같은 구분법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 마련을 위해 모든 국가들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한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질병, 기후변화, 테러 등과 같이 전 세계가 함께 직면하는 문제들의 영향을 받는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된 문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견 그렇게 보이는 문제조차도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해당 지역으로 그 여파가 돌아온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지구적 문제에 대해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 (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y)을 지는 방식으로 각국의 역량에 맞게 모두가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외교 담론도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2. 미중관계의 전개 향방에 따른 전략적 대응 마련에 몰두하기 보다 글로벌 무대에서 국제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이 더욱 필요하다. 브라질은 G2 시대의 도래와 초강대국 간 경쟁이 가지는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군사력이 가지는 의미는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축소 되었기에 군사력을 토대로 국력을 평가하고, 그 상대적 국력 변화에 기초하여 외교전략을 구상하는 것은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국가들과의 관계에는 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브라질은 미국과는 물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협력과 갈등을 동시에 겪는다. 이와 같이 자연히 발생하는 국가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와 같이 국제사회 합의 하에 구축된 제도들이 존재한다. 브라질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언제나 국제무대로 그 문제를 가져와 제도적 틀 내에서 해결하려 했고 이제까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세계화 시대에는 양자관계나 지역에 초점을 두는 외교보다 국제제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접근법이 더욱 유효하다.

 

3. 국제관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제안 그 자체보다는, 스스로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일관되게 실천함으로써 국제사회 내에서 신뢰를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모범을 보이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 평등한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특정 대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강제가 아닌 설득의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얼마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가?”의 문제보다 “자신이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실천함에 있어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제사회 내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오늘날 외교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과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표자

에드문도 후지타 대사는 상파울루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브라질 외무고시에 합격해 아시아태평양국, 런던, 도쿄, 모스크바, 유엔, 대통령 전략담당 비서실 등에서 근무하였다. 브라질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 및 인도네시아 대사를 역임한 바 있다. 2009년 주한브라질대사로 부임하였다.

 

사회자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 원장

 

토론자
김태형, 숭실대학교 교수
손    열,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장
장명수, 외교부 중남미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