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8
저자 박정진_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및 정치학으로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2009년에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지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2000-2002),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특임연구원(2008-2009)을 역임했다. 최근 저술로는 《日朝冷戦構造の誕生 1945-1965 : 封印された外交史》(저서), 《歴史としての日韓国交正常化Ⅱ:脱植民地化編》(공저), “Japan’s Choice: Possibility of a Renewal of National Strategy and Political Reshuffle,” “동아시아 냉전과 일조우호운동의 태동 : 일조협회의 결성을 중심으로,” “북한의 대일접근과 북송문제,” “도쿄도의 에스닉 정책과 재일조선인시책” 등이 있다.
I. 서론
우리는 지금 일본의 새로운 정치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는 사실 일본에 대한 관심에서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갈등에서 파생되고 있다. 한일관계가,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 간의 관계가 구조적 재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당사자인 한국(인)에 비친 일본은 위기에 있고, 이 위기를 극복할 능력도 소진한 상태이다. 이것이 양국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해석이 확산되고 있다. 갈등의 진원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정치에는 이 위기를 관리할 리더십이 부상하지 않고 있고, 장기적인 국가전략의 갱신도 지체되고 있다.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일본정치 자체가 전환기, 또는 이행기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이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일본정치의 새로운 리더십은 카리즈마 넘치는 정치인이기 쉽다. 일본 리더십을 논함에 있어, 본고가 도쿠다를 큐이치(徳田球一)에 주목하는 일차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쿠다는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던 전환의 시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에는 전후 일본정치사에서 역사화 되어 버린 혁신운동의 대안과 비전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본고는 문제관심이 여기에 있다.
전후 일본 정치리더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카리즈마의 부재이다. 그 만큼 도쿠다는 우리에게 낯선 정치 지도자이다. 전후 보수정정치의 비전과 대척되는 일본혁명과 혁신정치의 문맥에 도쿠다가 있다. 그에게는 요시다 독트린에 근거했던 전후 일본 정치 리더십에서 보기 힘든 강력한 대중호소력과 조직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요시다 독트린과 전후 일본보수정치와는 정반대로, 도쿠다의 일본공산당과 혁신운동은 격렬히 부상한 뒤 단기간에 역사 속에 사장되어 버렸다. 그런 도쿠다에게 그 간 ‘혁명 리더십’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왔다. 하지만 도쿠다의 리더십에는 ‘혁명’으로 일괄할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담고 있다. 도쿠다의 정치 이념과 그 행태에는 반제국주의의 기치 하에 전개 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즉 인터내셔널리즘과 그의 망명활동지인 북경에서 전개된 동아시아 공산주의운동, 그리고 일본 토착공산주의 문제와 오키나와로 대표되는 마이너리티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복합성의 심층에는 ‘냉전’과 ‘민족’의 문제가 공통적으로 내제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은 도쿠다 리더십의 현재적 함의를 논하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본고는 ‘혁명 리더십’으로서의 도쿠다의 카리즈마에 대한 평가를 재론해 보고자 한다.
본고는 패전 직후부터 도쿠다의 사망에 이르는 시기(1945-1953)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점령기 합법 일본공산당 재건을 둘러싼 도쿠다의 구상이 명료하게 드러나며, 일본 공산당의 대중투쟁과 의회투쟁에 있어 도쿠다의 리더십이 개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과 대일강화 그리고 일본공산당의 비합법화 시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리더십이 쇠퇴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도쿠다 사후, 그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유보되고 있다. 그의 출신지인 오키나와현 나고시의 카쥬마루 공원에는 공적을 그의 공적을 기념해 나고시에 의해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기념비에는 “為人民無期待献身”(인민을 위해 무조건 헌신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기념비는 1998년에 공비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당시 자민당, 공명당, 사회당(당시) 등 모든 정당이 찬성했지만, 일본공산당만이 태도를 달리했었다. 기념비뿐만이 아니라 도쿠다의 관계자료는 일본공산당이 폐기 처분해, 현재도 그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뒤늦게 발간된 《도쿠다 규이치 전집》또한 일본공산당사의 적자. 파벌의 잔류로서 평가되고 있다. 본고가 다루고 있는 도쿠다의 리더십과 그의 일본공산당 운동에 대한 기술과 평가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II. ‘경계인’으로 ‘타고난 혁명가’
도쿠다는 1894년 9월 12일 오키나와현 나고시에서 태어났다. 큐이치(球一)라는 이름은 오키나와의 다른 이름인 류큐(琉球) 제1의 인물이 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유년기의 도쿠다는 작은 체구에 머리와 눈만 두드러지게 큰 반면, 팔과 다리가 극도로 얇고도 짧은 약골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도쿠다 사헤이(徳田佐平)는 나고시에 있던 오키나와 현 구니가미 군청의 서기였다. 그는 가고시마 현 토족(土族)출신으로, 토착 오키나와인 보다 우수한 인종이라고 믿고 있었다. 도쿠다의 자전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막부 말기 경 가고시마 현 내에서 상선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회선사업을 했었다. 어머니 또한 가고시마현의 거대 상인과 오키나와 처 사이에서 출생했다.
오키나와에 있어 이들 가고시마인은 인도에 있어서 영국인, 전전의 만주에 있어 일본인, 그리고 전후의 일본에 있어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공무원이나 경찰관 등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들만의 사교사회를 가지고 있었다. 도쿠다 일가의 경우 오키나와에 살고 있는 가고시마인 중에서도 선별된 계층에 속해 있었다. 즉 젊은 도쿠다에게는 내지인 중에서도 상당한 신분을 가진 계통의 자식으로서의 자부심과, 다른 한편으로서는 오키나와인으로서의 피가 농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본토에 대한 열등감과 저항의식이 동시에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牧港篤三 1980, 125-136). 경계인으로서의 이중적 아이덴티티였다.
도쿠다의 성장과정에는 이러한 내면이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두뇌가 명석했던 도쿠다는 구제(旧制)오키나와 현립 제1중학교(현 오키나와 현립 수리고등학교) 졸업 후, 구제 제7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교관의 오키나와 출신자에 대한 차별에 반발해 퇴학하고, 고학으로 니혼대학(日本大学) 야간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된 후, 1920년에 사회주의동맹에 참가했고, 1921년에는 소련을 방문한 뒤 그 다음해에 비합법 일본공산당(제1차 공산당) 결성을 주도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도쿠다의 소련방문은 1925년과 1927년에도 지속되었고, 그 사이 상해에서 일본공산당 재건을 도모했었다. 이 경험은 도쿠다에게 국제 공산주의운동, 특히 코민테른에 매우 충실한 젊은 공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만들어 갔다.
그 뒤 도쿠다의 일대기는 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일치한다.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1928년 제1회 보통선거에서 노농농민당에서 출마(후쿠오카 제3구)한 것이었지만, 낙선하였다. 그 직후인 2월 26일에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포되었고, 곧이어 제2차 공산당 사건(3.15 사건)이 발생했다. 도쿠다의 긴 옥중생활의 시작이었다. 석방직전까지 후츄에 소재한 예방구금소에서 도쿠다는 비전향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의미의 ‘오야지’(オヤジ)로 불리었다. 당시 도쿠다는 52세로 최고 연장자였다. ‘오야지’라는 말은 단지 최고 연장자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다. 약관 35세에 옥중 생활을 시작해 18년 간 비전향 장기수라는 상징적의 존재이자 일본공산당 건설의 주역이었던 그는, 전후에 합법공산당이 결성되기 전에 이미 옥중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야지라는 호칭은 이른바 ‘수령’을 의미하는 경칭이기도 했다(西野辰吉 1978, 123).
III. 인민정부 수립을 향한 비전과 실천
1. ‘인민에 대한 맹세’와 ‘사랑받는 공산당’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발표되자, 도쿠다는 감옥 내에서 세포조직(프랙션)의 결성을 서둘렀다. 도쿠다는 이미 감방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출옥 후의 활동방침에 대한 이론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1932년 볼셰비키 혁명테제’(이하 32년 테제)의 전문과 인민전선전술을 학습했다. 특히 인민전선전술은 코민테른이 일본 국내에 보낸 ‘일본 공산주의자 앞으로 보낸 편지’가 교재가 되었고, 이를 전달해 준 것은 ‘전향자’들이었다. 하지만 도쿠다가 체계적으로 인민전선 이론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구체적인 강령적 내용 또한 소비에트 동맹의 공산당 규약을 주로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西野辰吉 1978, 124-125). 도쿠다의 새로운 일본 공산주의 운동 구상은 출옥하기 직전에 구체화되었다. “인민에 맹세한다”(이하 맹세)라는 문건이 그것이다. 이 문건은 도쿠다 리더십의 이념적 지향을 담은 최초의 문서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맹세”는 ‘연합국군대의 일본진주에 의해 일본의 민주주의혁명의 단초가 열린 것’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점령군인 연합군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와 그 정책에 대한 도쿠다의 이러한 인식은 일본공산당의 노선과 투쟁의 결정적인 명운을 드리게 된다. “맹세”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천황제를 타도하고, 인민의 총의에 기초해 인민공화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를 명시한 제3항이다. 그 외 제4항에서는 ‘군국주의와 경찰정치의 일소’를 ‘일본 민족의 해방과 세계평화 확립’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고 있고, 제5항에서는 구체적인 임무로서 ‘무상몰수와 그 농민으로의 무상분배, 노조의 자유, 단체교섭권의 확립, 실업보험, 8시간 노동제를 포함한 노동자, 근로자의 생활개선, 신앙의 자유, 군벌관료와 독점자본을 위한 통제의 폐지와 노동자, 농민근로자 외 탄압받아온 인민을 위한 통제, 18세 이상의 남녀의 선거권에 의한 국민의회 건설’ 등을 들고 있었다. “맹세”는 이러한 ‘목표와 임무에 동의하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을 만들고, 인민공화정부도 이러한 기반 위에 수립될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황제 권력과 타협해 발전해 온 가짜 자유주의, 가짜 사회주의인 천황제 지지자들의 지도자들’과의 협력에 대해서는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アカハタ> 1945/10/10).
도쿠다의 석방은 후추 형무소를 방문한 저널리스트 로베르 기란 등 프랑스인 저널리스트들의 제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기란 일행에게 발견된 일본공산당원들 중에는 도쿠다 외에, 시가 요시오(志賀義雄), 미타무라 시로(三田村四郎), 니시자와 다카지(西沢隆二), 구로키 시게노리(黒木重徳),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마츠모토 가즈미(松本一三), 그리고 재일조선인 이강훈, 김천해 등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후츄 형무소의 철문 앞에는 8백여 명이 운집했다. 이들에게는 “맹세”가 배포되었고, 모인 사람들은 이를 매우 감격스럽게 받아 들었다고 한다(杉森久英 1964, 205). 뒤이어 도쿠다 일행이 GHQ앞에서 연합군 만세를 외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곧이어 자립회라는 도쿄 근교 고쿠분지의 한 수인보호시설에서 합법공산당의 활동은 시작되었고, 여기서 도쿠다와 시가는 중앙기관지 <아카하타> 재 창간 제1호를 10월 20일에 발간했다. 이 지면에 “맹세”가 ‘일본공산당 출옥동지 도쿠다 큐이치, 시가 요시오 외 일동’의 연명으로 발표됨에 따라 도쿠다의 초기 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アカハタ> 1945/10/10).
GHQ의 초기 점령정책과 도쿠다의 “맹세”를 대조해 보면, 도쿠다의 그 것에 경제조직개편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을 빼면, 거의 일치하는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32년 테제의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론에 머물러 있던 도쿠다에게 있어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회당과 비교해 볼 때도, 맥아더 만세를 외친 도쿠다는 당시 일본 국민 속에서 많지 않은 점령군의 심리적 동반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전후 일본 속에 공산당의 존재감이 ‘초원을 불태워버릴 정도의 기세’를 가지게 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던 데에는 천황제에 대한 태도가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이었다(杉森久英 1964, 213; 西野辰吉 1978, 142). 공산주의자들 대부분이 천황제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천황에 대한 증오 또는 분노는 이론의 영역을 넘어 거의 편집증적인 감정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다름 아닌 도쿠다였다. 하지만 천황 또는 황실에 대해 감정적으로는 오히려 친근감을 가지고 있던 평범한 대부분의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친 것이었다.
도쿠다는 오키나와 출신자라는 특별한 입장에서, 처음에는 먼저 오키나와에 있어 권력자인 가고시마인들을 증오했고, 그 연장에서 본토에 있는 모든 권력자와 권력기구를 증오했다. 그 정점에도 다름 아닌 천황이 있었다. 따라서 천황제에 대한 부정은 오키나와의 독립이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1946년 2월, 일본공산당 제5회 대회는 일본 본토 주제 오키나와 현민 조직인 오키나와인 연맹의 전국대회에 즈음해, “오키나와민족의 독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키나와인은 “일본의 천황제 제국주의의 착취와 탄압을 받아”왔던 ‘소수민족’이며, “다년간의 염원이었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는 길에 서게 된 것”에 축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947년 12월의 제6회 대회에서도 오키나와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항목이 행동강령 안에 들어갔다. 이는 도쿠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일본공산당의 당세확장에 있어 현저한 장애요인이었다. 오키나와를 식민지로서도 또는 속령으로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그저 일본의 일부로만 배워오고, 실제로 그렇게 믿어왔던 대다수의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불만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던 아내에게 갑작스럽게 이별통지를 송부한 폭군과 같은 행위”였다(杉森久英 1964, 215). 현실적으로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경우 정치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공백상태였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