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소통 강조’ 눈길]

 

최근 몇달새, 주요 언론 지면에는 전에 볼 수 없던 꽤 낯선 풍경이 간간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 보수언론이 대표적 진보 언론인·지식인을 만나 장시간 인터뷰를 갖거나, ‘극우 논객’으로 분류되던 대표적 보수 언론인이 “세상은 우파 논리 일변도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보수정당이 기업을 활성화해서 나라의 곳간을 채우느라고 소홀했던 분배와 복지의 기능을 진보·좌파정당이 들어와 해주고 다시 곳간이 비워지면 보수정권이 들어서는 기능의 정치, 순환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식이다.

 

강조점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합리성과 상식을 갖춘 진보·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 양자가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보수 쪽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시쳇말로 가장 ‘잘 팔리는’ 진보 논객이라 할 수 있는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각종 매체에 나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도 그것이다. 조 교수는 지난 1월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합리적이고 성찰적이면서 공정한 보수와 진보가 공존해야 한다. 이런 가치를 저버리면 아군이건 적군이건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동아일보 1월22일자 8면.

 

1월 9일자 중앙SUNDAY 1면을 대문짝 만하게 장식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인터뷰에서는 ‘소통’이 특히 강조됐다. 대담에 나선 김종혁 편집국장은 “중앙일보는 열린 보수를 지향한다. 일류 진보는 대우해 주자는 입장”이라고 인터뷰 취지를 밝혔고 오 대표는 이에 “생산적이고 양심적인 보수와는 악수하자는 입장”이라고 화답했다.

 

중앙SUNDAY 1월9일자 1면.

 

보수언론-진보언론인 만남

대표 보수논객 ‘순환론’

소통 통한 공동체 지향 흐름?

 

앞서 ‘순환의 정치’를 강조한 인물은 바로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으로, 그 역시 지난 1월 24일자 해당 칼럼에서 “우파라고 해서 좌파의 모든 것을 ‘적안시(赤眼視)’하거나 좌파라고 해서 우파의 모든 것을 ‘꼴통시(視)’ 하는 경향에 이끌려서도 안 된다”며 양 측의 환골탈태와 역지사지를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왜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변신’과 ‘소통’을 강조하며 각자 접점 찾기에 나선 것일까. 돌이켜보면 이러한 분위기는 지난 2009년 중반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에서 나타난 좌우의 극단적 대립 양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2009년 7~9월 경향신문의 <한국, 소통합시다> 기획, 지난해 4~12월 중앙일보의 <보수와 진보, 상생과 소통을 말하다> 기획, 7~9월 동아일보의 <대한민국, 공존을 향해> 기획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조선일보 1월25일자 38면.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조교수(미국학)는 이를 “상호공존, 상호이익의 동등한 공동체, 즉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미 몇년 전부터 보수언론은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찾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진보 쪽이 먼저 제시한 바 있는 공화주의”라고 보는 안 교수는 그 배경으로 “이른바 ‘뉴라이트’로 꽤 오래 재미를 봤지만 이제 그 수명이 다했고, 또 자유로운 개인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는 더이상 ‘억압적’, ‘배제적’ 방식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점을 꼽는다.

 

이러한 고민의 일단은 “과연 이 나라에 따뜻한 보수, 합리적 진보는 있는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소모적 쟁투의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보수세력은 소외되거나 패배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돌이켜봐야 한다”는 지난해 동아일보의 한 사설에서도 확인된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나아가 총선·대선 등 내년 권력재편기와 연결지어 최근 분위기를 바라보기도 한다. “진보정권(김대중·노무현), 보수정권(이명박) 다 겪어봤지만, 많은 국민이 ‘다 그게 그거’이고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 ‘진보’, ‘보수’만을 내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일부 언론이나 지식인, 정치인이 기존 진보·보수의 경계를 넘어선 ‘합리성’, ‘공정성’, ‘소통’을 강조하는 건 정확히 다수 대중의 정서에 부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도 그랬지만 자신의 이념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국민의 20~30%가 한나라당의 유력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현실이다. 박 전 대표 본인 역시 최근 ‘보란듯이’ 복지 담론을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진보·보수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차차기 대권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지난 1월 30일자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이제 진보·보수의 차원에서 빚어진 갈등은 극복할 때가 됐다. 진보의 국민 따로 있고 보수의 국민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이와 관련 “차기 대선 지도자는 누가 되든 유연하게 진보·보수의 양면적 가치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강점을 가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정 부소장은 “전체 유권자 중에서 진보·보수라는 양극화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 층이 대략 60% 정도 되는 것 같고, 나머지 40% 정도는 양면성을 공유하고 있는 상충적 유권자로 보이는데, 후자의 유권자 규모가 상당히 늘고 있으며 이들이 무당파,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다수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정 부소장에 따르면, 이들 계층은 성장과 복지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둘 다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경제적으로는 진보 성향이면서 대북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북정책 내에서도 강경한 정책에 반대하는 햇볕정책을 선호하면서도, 북한에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상호주의적 선호를 동시에 갖고 있다.

 

결국 사안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합리성과 설득력 등을 따져 자신의 선호를 결정한다는 것인데, 이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피격에서 북한을 옹호하려는 교조적 좌파논리에 고민하는 진보세력을 보았고, 전쟁불사를 내세우는 도식적인 우파의 ‘애국심’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젊은 보수도 볼 수 있었다”는, 앞서 조선 김대중 고문의 칼럼에 담긴 ‘고뇌’와도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일각선 ‘말잔치 소통’ 우려

빈곤· 실업 등 ‘심각한 현안’에

진정성 있는 대안 주목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합리성 강조나 양측의 소통 강화 등에 대한 진보·보수 쪽 각각의 반응은 어떨까. 언뜻 보면, 주요 언론이 나섰고 명망있는 지식인들까지 팔을 걷어붙인 사안인데, 그리고 말 그대로 상식적인 분위기에서 대화 좀 하자는 건데 굳이 딴지를 걸 게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일각의 견해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중앙SUNDAY의 오연호 대표 인터뷰가 나온 직후 진보 성향의 미디어스에는 “오 대표 인터뷰는 그간 숱하게 중앙일보를 비판해온 매체와 시민사회의 입장을 졸지에 ‘이류 진보’로 규정되도록 만들었다. 중앙일보가 ‘종편’을 파는 매대에 오 대표가 미끼 상품으로 ‘전시’됐다”는 혹독한 비판 글이 실렸다. 중앙일보가 과연 ‘열린보수’, ‘일류진보’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 종편 선정 이후 이미지 변신을 꾀하는 중앙일보에 오 대표가 이용당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보수 쪽에서도 마뜩잖은 반응이 나온다. 류근일 조선일보 전 논설주간은 지난 1월 26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불통(不通)은 왜 있는 것인가? 한국 진보 내부에 NL 등 극좌 증후군이 침윤해 고삐를 죄고 있기 때문”이라며 “(보수 진보가 진정한 양 날개 짓을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앞서야 할 것이 극좌친북임을 자임하는 진보가 극좌친북에 대해 분명하게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소통의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열린진보’, ‘합리적인 보수’을 강조하는 측으로서는 이런 류의 목소리가 ‘비합리적인 진보’, ‘꽉 막힌 보수’의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윤철 교수는 “닫힌 진보, 닫힌 보수까지 끌어안고, 설득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통’”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열린’ 진보·보수끼리의 대화는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서민들, 빈곤층을 배제한 엘리트들끼리의 ‘말잔치’밖에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일찍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최근 제기되는 방식의 ‘소통’과 관련해 그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민주적인 의사형성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이들 차이 간의 합리적 경쟁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넓혀가는 과정이라 할 때, 사전에 정해진 어떤 의사, 가치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소통이라는 말을 쓰면서 발생하는 역설적인 현상은, 그것이 개인 의사든, 집단 의사든 의견, 의사의 소통을 더 자유롭게 하고 그 범위를 넓히기보다 이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2009년 7월 경향신문)

 

최 교수는 그 이유가 “협애하게 제한된 좌우 스펙트럼의 틀에서 비춰지는 양극단은 나쁜 것이고, 중간이 좋다는 가치판단을 동반하기 때문”이라면서 “그 결과는 중산층적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그렇지 않은 여러 의사를 제약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보다 없애는 효과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최근 진보·보수를 둘러싼 논의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중심 잣대는 현재 ‘우리’ 앞에 닥쳐 있는 수많은 ‘심각한’ 문제들, 빈부격차나 빈곤·실업·노동 문제 등을 해결할 진정성 있는 의지나 대안이 과연 그 ‘합리’와 ‘소통’ 속에 담겨 있는가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 첫걸음은, 현재 그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