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피해 제3자 변제안 기로 “일본은 불안하고, 한국은 불만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대위변제 해법을 내놓은 이후 한·일 외교가에서 심심찮게, 최근 들어서는 더 자주 들리는 이야기다. 3자 변제의 핵심은 대법원에서 승소해 손해 배상 권리를 확보한 징용 피해자들에게 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피고인 전범 기업들을 대신해 우선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것이다. 일본 전범 기업들이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실제 배상이 이뤄지지 않자 어떻게든 피해자들이 실질적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한 방안이다. 대신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원하는 기업은 재단에 기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놨다. 한국의 ‘불만’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호응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현재까지 일본 기업의 기금 출연은 전무했고, 재단의 자금은 거의 고갈됐다. 재단에 따르면 1차 변제 이행 이후 추가로 승소 판결을 받은 피해자 52명의 대부분이 3자 변제를 통한 배상금 수령을 원하는데, 정작 줄 돈이 없어 지급이 중단된 상태다. 불만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지난 19일 발표한 여론조사(성인남녀 1006명 대상)에 따르면 3자 변제안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지난해 34.1%에서 올해 39.7%로 늘었다. 긍정적 평가도 늘긴 했지만(28.4%→29.5%) 상승 폭이 크지 않다. 또 ‘일본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태도’를 묻자 57.6%가 “나쁘게 평가한다”고 답했고, 26.9%만 “좋게 평가한다”고 했다. 지난해도 부정적 평가가 더 많긴 했지만(부정 34.2%, 긍정 15.0%), 차이는 올해 훨씬 크게 벌어졌다. 일본의 ‘불안’은 한국의 결정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한국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국내 정치적 상황에 따라 한·일 관계가 부침을 겪기 때문이다. 위안부 합의 훼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시도 등이 있었으니 불안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그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 “우리가 물잔을 먼저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 반 잔을 채워줄 것”(박진 전 외교부 장관)이라는 기대는 빗나갔고, 여전히 잔에는 물이 반만 차 있다. 이게 3자 변제안이 기로에 서게 된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정치권의 영향이다. 한국 기업조차 재단에 적극적 기부를 꺼리는 배경에는 20%대로 폭락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거야(巨野)가 폭주하는 가운데 기업은 국정 운영 동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정부가 밀어붙이는 3자 변제안에 동참할 경우 ‘뒤탈’을 걱정한다는 전언이다.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노력을 무조건 친일과 굴욕으로 몰아가는 야권의 행태가 이를 조장하는 측면이 크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방안을 정부가 강요한다는 식의 논리도 사실 맞지 않는다. 2018년 10~11월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 15명 가운데 11명이 재단으로부터 판결금을 받았다. 3자 변제안을 수용하지 않는 피해자가 있는 것이지, 피해자 전체가 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가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태를 통해서도 이미 깨닫지 않았나.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믿고 기다리기만 하는 윤 정부의 태도다. 결단은 했지만, 일본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하도록 만드는 집요한 촉구는 보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3자 변제 해법 결정 뒤 “한·일 관계 개선의 혜택을 국민이 체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국민 마음속에 응어리진 과거사 문제에서 진전 없이는 어떤 성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사이 가장 고통받는 것은 피해자와 가족이다. “아버지를 너무 그리워하니 꿈에 나오셨는데, 정작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가 숨진 어느 유복자의 이야기다. “평생 괜찮아 보이셨는데, 치매에 걸리시니 젊은 시절 기억만 다시 생생히 되살아나 매일 그때 고통을 다시 겪으세요.”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손자의 이야기다. 이들을 위한 진정한 정의 실현 없이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윤 정부의 노력은 업적(legacy)이 아닌 미완의 과업(unfinished business)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