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허와 실
21세기 초 아시아는 세계 다른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세력경쟁의 지역이다.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놀라운 발전의 지역이기도 하지만, 급속한 군비증강과 경제위기, 핵 개발의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역공동체를 만들기에는 피가 너무 뜨겁다. 경쟁의 지역에서 살아남아 지역의 맹주가 되기 위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욕망은 그럴듯한 나름대로의 동아시아 공동체론으로 포장되어 있다.
아시아 공동체를 내세운 지역 만들기 싸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1880년대에 일본이 선보였던 흥아론(興亞論)과 탈아론(脫亞論)과 같은 아시아 맹주론은 결국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졌다. 현재 미국에 치우친 외교노선을 보완하기 위해 일본은 매우 공격적으로 아시아 공동체론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전통 천하질서에서 이미 아시아를 호령해 본 적이 있다. 2020년까지 소강사회의 전면적 건설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대동(大同) 아시아의 꿈을 펼쳐 나갈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미국의 중국 견제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미국도 아시아공동체 싸움에서 물러서 있지 않다. 아시아 밖에서 세계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은 군사변환과 변환외교를 두 축으로 동아시아 무대에서 미국적 가치와 행동 양식의 전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 제시되고 있는 다양한 아시아 공동체론은 과거 담론들의 단순한 부활이 아니다. 노골적인 군사·경제 전쟁이 아닌 공동체 건설을 둘러싼 경쟁은 좀 더 은밀하고, 장기적이며, 보편적인 가치관과 국가이익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까지 확대되고 있다. 21세기 아시아 지역경쟁 구도에서 한국은 아시아 공동체론의 신화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아시아 종주를 꿈꾸는 주변국들이 자신이 설계한 집 속에 한국을 위치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가는 길목에서 아시아를 우리의 안락한 삶터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지역 설계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조급한 경쟁구도나 막연한 아시아 공동체를 상정할 것이 아니라, 현실 국제정치의 다양한 영역에서 촘촘한 지역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전재성 서울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