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연구원은 한국 외교의 미래 비전으로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견국 외교는 국력기준에 의해 중견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외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외정책의 특징에 의해 좁은 의미의 국익과 더불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외교, 그리고 지역적•지구적 차원의 아키텍처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외교를 일컫는다. 중견국 외교는 미중간 세력균형 변화에 따라 증대되는 지역 불안정성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한국 외교의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본 연구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연구원은 2013년 10월 31일 호세 루이스 베르날 로드리게스(H.E. José Luis Bernal Rodríguez) 주한멕시코대사를 초청하여 “멕시코의 중견국 외교전략과 한국”을 주제로 제5회 주한외국대사 초청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했다. 베르날 대사는 현재 멕시코 외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리•경제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설명했고 이어서 토론자들과 향후 한국과 멕시코의 협력 방안 및 새롭게 시도되는 중견국 협의체 MIKTA(Mexico, Indonesia, South Korea, Turkey and Australia)의 발전방향에 대한 제언을 중심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주요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외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멕시코는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나라 중에서는 가장 큰 국가이다. 1억 2천만 명의 인구는 물론이고, 세계 11위인 약 2백만 평방 킬로미터의 영토는 한국 면적의 스무 배가 넘는다. 경제 규모는 세계 12위, 유엔(United Nations: UN) 재정기여도는 세계 10위를 차지한다. 2009-2010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이었으며, 현재는 주요 20개국 모임(Group of 20: G20),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중견국 협의체 MIKTA에 참여하고 있다.
멕시코의 위상 및 역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지리(국경선, 이웃국가, 국가안보, 대외연결성), 자원, 역사, 문화, 사회(인구, 교육, 복지), 경제(성장, 개혁), 정치적 발전(민주주의), 대외관계(무역과 투자 네트워크), 외교정책(원칙, 우방과 적국, 능동성, 국력), 리더십(국정 운영방향, 국제사회로의 투사)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현재 멕시코의 중견국 외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지리•경제적 요인이다.
지리적으로 멕시코는 미국과 국경을 마주하며 북미 대륙에 위치하고 있지만, 동시에 중남미의 경계 부분에 자리해 있다. 태평양에 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멕시코 만을 지나 대서양과도 닿아있어 세계 모든 지역과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 때문에 3천 년이 넘는 역사 동안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혼합되어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멕시코는 성장 가도에 있다. 세계 10대 교역국에 속하는 멕시코는 현재 세계 최대 경제 블록 중 하나인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 NAFTA) 회원국이다. 아울러,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콜롬비아, 칠레,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는 물론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을 포함한 총 45개 국가와 특혜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미국의 제2 무역파트너이자 라틴아메리카 제1의 수출국이고, 신흥 부상국 가운데 6번째로 많은 해외직접투자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멕시코가 거둔 성과의 중심에는 NAFTA가 있는데, 협정 체결 이후 멕시코의 대외무역량과 해외로부터 직접투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멕시코는 자원을 주로 수출하는 나라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 제조업 분야에서도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멕시코는 세계 4위의 자동차 수출국이자 전기가전•섬유•컴퓨터•휴대폰 분야 등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최근 항공우주분야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멕시코 경제는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자리 창출, 국가 재정 건전성 유지, 은행 시스템 개선 등의 노력을 통해 2010년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멕시코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여전히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개방성을 유지해나가야 할 뿐 아니라 사회 인프라 개선 노력도 지속 되어야 한다. 특히 빈곤, 소득 불평등, 공공안전 문제는 아직 심각한 수준이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제도화 문제에 있어서도 부패 근절, 법치의 확립 등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이를 위해 작년 12월 취임한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멕시코 대통령은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데, 특히 공공안전 확립, 법치 구축, 빈곤 퇴치, 교육 시스템 및 노동 규정 개선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멕시코는 오랜 독재체제의 경험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적 가치의 기반이 취약한 편인데, 이 때문에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국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조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멕시코의 외교
멕시코는 외교정책 차원에서 자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결, 국가간 평등, 내정간섭 반대 등의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의 절반 가량을 상실한 경험이 있는 멕시코는 무력이 국제정치의 해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며,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을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내적으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국제개발협력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 외교의 핵심기조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국제법, 국제기구 등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국가 안전보장, 주권수호, 영토보전이다. 둘째,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외교로, 교역확대, 투자 및 관광객 유치, 세계시장에서 멕시코 기업의 이익 보호를 추구한다. 셋째, 국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로, 빈곤•과학기술협력•인간안보 등의 분야에서 국제적인 협력을 도모한다. 넷째,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OECD, MIKTA, APEC, NAFTA 내에서 “뜻을 같이 하는”(like-minded)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
현재 멕시코는 국제사회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를 닦고 있다. 앞서 언급한 수많은 국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노력하고, 그 성과에서 비롯된 경험을 토대로 국제사회에 기여하려 한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 멕시코의 역량은 대내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국제협력 차원에서는 현재 FTA를 체결하고 있는 국가들에 역점을 두고 선택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멕시코 내에 국제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들이 부족하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향후 멕시코-한국의 중견국 외교를 위한 제언
1. 중견국 협의체 MIKTA는 아직 태동 단계에 있어 구체적인 역할을 논의하기 이르며, 우선적으로 어떤 이슈에서 연대가 가능할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MIKTA는 처음 시도되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이다. 의장국 또는 사무국이 필요할지에 대해서조차 결정이 나지 않았다. 호주는 MIKTA가 공식적인 제도로 구축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비공식적이고 유연한 네트워크로 남길 바라고 있지만, 최소한의 운영을 위한 조직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 첫 모임에서 개발협력, 사이버안보, 환경, 기후변화, 난민, 재난구호, 보건, 민주주의 발전 등 여러 이슈들이 논의되었는데, 터키와 인도네시아는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추가 참여국을 모색하는 일보다 현재 협의체에 포함된 국가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이슈를 중심으로 연대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NAFTA가 처음 태동될 때에도 회원국들이 협력할 영역 가운데 어떤 것을 배제할 것인지를 두고 먼저 격론을 벌였다. MIKTA도 이제 모임이 시작되는 단계인 만큼 우선 각국의 다양한 입장과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향후 어떠한 형태로 협의체를 이끌어 나갈지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
2. MIKTA는 제3자로서 남북한간 소통 개선 및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협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 현재 MIKTA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한반도 문제에 직접 관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비당사국들의 연대로서 MIKTA는 한국과 북한이 더 나은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아울러 MIKTA는 다양한 지역 출신의 국가들로 구성된 협의체이므로, 북한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정권에게 여러 형태의 패키지를 제시하고 향후 북한의 경제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포괄적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촉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3. 중견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독립성이 확보되어야 하다. 미국은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지만, 멕시코는 미국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따라가지도 않는다. 멕시코는 쿠바 혁명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정한 국가였고, 여전히 쿠바와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멕시코는 복합적 정체성과 세계 모든 지역에 연결된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여러 지역, 다양한 국가들과 원만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중견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전략적인 독립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
발표자 호세 루이스 베르날 로드리게스(H.E. José Luis Bernal Rodríguez) 주한멕시코대사는 다자경제관계 및 북미관계 심의관, NAFTA 협상 미의회 담당 조정관, 수석경제고문 등 멕시코 외교부 내 재경•통상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스웨덴, 체코 대사를 역임한 바 있고, 2013년 7월 주한멕시코대사로 부임하였다. 베르날 대사는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를 졸업하였고, 경제연구교육센터(Center for Research and Teaching Economics, Mexico: CIDE)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사회자
토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