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연구원은 한국 외교의 미래 비전으로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견국 외교는 국력기준에 의해 중견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외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외정책의 특징에 의해 좁은 의미의 국익과 더불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외교, 그리고 지역적•지구적 차원의 아키텍처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외교를 일컫는다. 중견국 외교는 미중간 세력균형 변화에 따라 증대되는 지역 불안정성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한국 외교의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중견국 외교를 논할 때에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가를 중견국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은 국력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국력을 평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제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제력은 안보영역에서의 국가역량뿐 아니라 다자외교 등 여러 외교무대에서 외교력으로도 전환될 수 있는 중요한 권력자원이다. 따라서 경제력은 해당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되는데, 이 때문에 중견국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우선 ‘상당한 규모’(substantial size)의 경제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구체적인 외교행태와 가치•규범의 차원에서 중견국의 요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견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국제문제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특히 현존 국제제도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물론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있어 정확하게 특정 국가들을 중견국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주요 20개국 모임(Group of 20: G20)에는 참여하지만 주요 8개국(Group of 8: G8)에는 포함되지 않는 국가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2012년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 기준으로 볼 때 호주는 세계에서 12위(1조 5,420만불), 한국은 15위(1조 1,560만물) 정도의 위치에 있어 대표적인 중견국 그룹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브릭스(Brazil, Russia, India, China: BRICs) 그룹에 속한 국가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중견국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국가들이다.
호주가 중견국 외교를 지향하게 된 배경에는 현재 진행 중인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환이 있다. 중국, 인도, 브라질과 같은 국가들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통해 국제사회 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에 반해 미국, 유럽연합, 일본 등의 기성 강대국들은 성장세가 둔화되고, 특히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세계정치에서 권력배분 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앞서 논의한 중견국 범주에 속하는 국가들은 공히 기성 강대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신흥 부상국들과의 관계를 동시에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경제성장세를 지속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중견국들은 세계적인 세력전이 상황에서 변화의 주축이 되는 두 그룹의 국가군 모두와 안정적으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지역 내 평화안정을 지켜나가면서 동시에 기후변화, 국제범죄나 난민 문제와 같은 비전통안보위협, 무역자유화, 식량•에너지 안보, 사이버 안보 등과 같은 글로벌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적극 관여해야 한다.
문제는 제한된 국력 때문에 이와 같은 도전과제를 중견국 각자의 힘만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중견국들은 자국의 핵심이익을 지키기 위해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를 모두 활용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전통적으로 노동당(Australian Labor Party: ALP)은 다자주의를, 자유•국민연립당(Australian Coalition, Liberal-National)은 양자주의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번 9월 호주 총선 결과 야당인 보수연립당이 승리하여 정권 교체를 이뤄내고 줄리 비숍(Julie Bishop) 신임 외교장관이 임명되었지만, 흥미롭게도 비숍 장관은 유엔총회를 첫 해외방문 일정으로 잡았다. 시리아 화학무기 해체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지난한 논의과정은 다자주의의 한계와 비효율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양자주의의 효율성을 강조해왔던 연립당이 다자무대를 첫 외교행보로 삼았다는 것은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향후 행보를 더욱 유심히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이는 중견국 외교가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를 모두 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최근 동향을 살펴보면, 유엔 총회를 즈음하여 9월 25일 비공식 중견국 협의체, MIKTA(Mexico, Indonesia, South Korea, Turkey and Australia)가 출범하였다. 이번 회의에서는 호주, 한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터키 외교장관이 함께 모여 각국이 공동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안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현안들을 두고 논의해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 의견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중견국 협의체가 이제 막 태동하는 단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중견국들 간 협력이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실질적인 연대를 구축할 수 있을지 여부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번 5개 중견국 모임은 민주주의, 인권, 자유무역 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like-minded) 국가들이 모인 것으로 국력의 상대적 크기나 특정 지역의 대표성 문제가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았다. 특히, 한국•호주•인도네시아의 경우 모두 동아시아 지역 내 위치한 중요한 중견국들이지만 터키와 멕시코가 이번 회합에 참여한 것은 외교장관들 사이의 친밀성(chemistry), 역사적 우호관계, 그리고 미국•캐나다와 같은 주요 행위자들과의 관계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국가들이 모두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회의 장소가 뉴욕인 점을 미루어 보아 결국 중견국 연대가 미국 주도의 협력체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으나, 앞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번에 참여한 국가들은 세계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는 폭넓은 연대이며 뉴욕이 아닌 유엔이 모임의 배경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중견국들은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보다는 현존 지역•국제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오늘날 다자주의 제도들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G20의 경우에도 현재까지 유용성을 입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것이 국제사회 협력 증진을 위해 정말 중요하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의 경우에도 도하라운드의 실패 이후 무역자유화를 위한 다자레짐 창출에 제동이 걸려있는 상태이다. 유엔도 앞서 언급한 시리아 문제의 경우에서 보듯 효율적인 문제해결 능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중견국 연대는 추가로 새로운 제도를 창설하는 데 역량을 소진하기보다, 이미 운영되고 있는 지역•국제 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데에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동북아의 경우에도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중요한 제안이 될 수 있지만, 우선적인 노력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과 같은 기존 협의체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모아져야 한다.
2. 중견국 연대는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적이고 열려있는(inclusive) 유연한 협력체여야 하며, 고정적인 블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앞서 강조한 바와 같이 중견국은 기존 강대국은 물론 부상국과도 긴밀한 협력을 해야만 국익을 지켜나갈 수 있다. 배타적인 블록을 형성하게 되면 중견국 연대가 아이디어와 가치를 중심으로 국제사회 내 다자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건설적인 협력체라는 메시지를 다른 국가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본 협의체는 되도록 비공식적인 형태로 모임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한국이 강조하는 것처럼 ‘덜 분쟁적인’(softer) 이슈에서부터 협력 증진을 추구하는 방식의 점진적 발전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열려있는 협의체라 하더라도 가치의 공유는 꼭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캐나다가 비록 G8 그룹에 속해 있지만 향후 중견국 연대에 포함될 수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는 G20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무역자유화 가치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연대에 포함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현 호주 보수연립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중견국 외교가 지향하는 다자주의는 기존의 양자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호주 모두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요 국가와의 양자관계가 국익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중견국 외교는 주요국과의 양자주의와 함께 추진될 수 있다.
4. 한국은 북한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를 넘어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장기적인 국익을 도모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오늘날 한국이 있기까지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익은 지속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동안 한국은 국제사회 문제 해결 과정에 일익을 담당할 만한 여력을 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역량과 국제사회 내 위치를 고려해 볼 때 한국은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중관계 등과 같은 양자문제를 넘어 지역과 세계무대에서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기후변화나 인권, 국제범죄 등과 같은 글로벌 이슈 해결을 위해 한국이 노력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국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국제사회 내 한국에 대한 지지를 결집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크게 이바지 하는 길이 될 수 있다.
5. 중견국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호주 간 협력 증진이 매우 중요하다. 유럽에도 중견국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국가들이 상당수 있지만, 이들 국가들은 유럽연합의 협력틀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 ‘열려있는 중견국 연대’를 구축하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 G20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호주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은 향후 국제 중견국 연대의 발전을 위해 양국의 협력이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당시 한국과 호주는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금융권 개혁을 먼저 경험했고, 이 때문에 유사한 2008년 세계경제위기 국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케빈 러드(Kevin Rudd) 호주 총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도 양국 협력을 증진하는 좋은 촉매가 되었다. 현재 양국은 지난 7월 ‘2+2(외교•국방장관) 회의’를 개최한 이후 양적•질적으로 협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조속히 한호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을 체결하여 양국의 경제협력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릴 뿐 아니라 국제규범과 가치 차원에서도 자유무역 기조를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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