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이대로 안된다 … 공로명·김영희 대담

 

공로명(왼쪽) 전 외무부 장관과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는 최근 한·일 관계에 대한 대담에서 “한·일

정상회담은 국익을 고려해 담대하게 생각하고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박종근 기자]

 

“한·일 관계, 이대로는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외치(外治)’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미·중 정상과의 일련의 균형외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완벽한 듯했던 박근혜-오바마 회담 뒤 미국은 일본으로 기우는 듯한 조짐이다. 최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미국이 환영하고 나선 게 대표적 징후다. 한·중이 가까워지면서 미·일동맹의 결속력이 오히려 공고해졌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완전히 포기해 이제 한·중 관계가 북·중 관계를 추월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좋은 분위기 속에 회담을 마친 직후 중국은 탈북자를 북송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일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외교는 고도의 탄력적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과의 사이에 쌓아둔 ‘절벽’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2년째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사·독도 문제로 촉발된 갈등에 얼마전 스가 일본 관방장관의 안중근 의사 모욕 발언까지 더해져 외교가 아닌 국민 감정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본지 김영희 대기자와 공로명(81) 전 외무부 장관이 지난 19일 동아시아연구원에서 만나 ‘대일 외교 이대로 괜찮나’를 주제로 대담을 했다.

 

김영희 대기자=“한·일 관계가 안갯속이다. 일본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거듭 제의하고 있으나, 박 대통령은 일본이 정상회담의 분위기부터 먼저 조성하라며 거부하는 입장이다. 개별 정치인들의 망언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외교는 쌍방의 이익과 입장을 조정하는 것인데 만나지도 않겠다는 건 너무 소극적인 태도 아닌가.”

 

공로명 전 장관=“작년 말에 출범한 아베 정부의 과거사 반성에 대한 입장이 흔들리면서 양국 간 신뢰문제가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관되게 표명하던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오락가락하며 한·일 관계에 큰 장애요소가 됐다. 하지만 냉정하게 정치·경제·안보상의 이익을 따져보면 일본과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등을 감안한 안보 차원의 고려가 필요하다. 양국 정상 간 대화가 단절된 것이 정상적 상황은 아니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일 관계의 긴장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조용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야스쿠니 대신 무명용사 묘지인 지도리가후치 묘원을 방문한 게 대표적이다. 정상 간 대화를 통해 서로 생각을 정확히 알고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이는 양국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는 길이기도 하다.”

 

김 대기자=“북한 핵·미사일을 고려한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구와 안보·경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국익을 생각해서 우리 쪽에서 담대하게 전략적 양보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공 전 장관=“아베의 경우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에 모순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근 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야스쿠니 방문을 자제하면서도 방문 의지를 밝히는 것이 그렇다. 일본의 속사정을 안다면 담대하게 생각하고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 정상회담을 한다고 해서 과거사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톱(대통령)의 말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외교부는 얼어서 일본과 이야기도 못 하는 상황이다. 중앙정부 간 긴장이 고착화되면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풀뿌리 교류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김 대기자=“한국이 오히려 유연성이 더 부족한 것 같다.”

 

공 전 장관=“일본이 8부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6부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사실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가면서 한·일 관계 경색이 시작됐다. 물론 일본의 정치인들이 망언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이 일본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를 했다”는 표현을 담았고, 김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화해’를 표명했다.

 

김 대기자=“집단적 자위권이 새로운 이슈로 추가됐다. 한국이 우려하는 건 유사시 일본 군대의 한반도 진출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은 일본군의 한반도 진출에는 우리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제법상으로도 집단적 자위권 자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북한이 남한을 전면 침공했을 경우다. 우리가 일본의 지원을 일절 배제할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공 전 장관=“집단적 자위권은 개별 국가의 주권에 관한 사안으로 유엔헌장도 권장하고 있다. 한·일 간 특수한 역사적 관계로 인해 우리의 국민 감정에 반하는 측면이 있지만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서 보듯 북한의 호전적인 자세를 고려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후방 기지가 일본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전쟁 때 미군을 주축으로 한 50만 명 이상의 유엔군이 한국에서 작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후방 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적 자위권이 뭔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 대기자=“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보통국가화에 대한 한·중의 우려도 크다. 여기에 대한 방법으로 서독과 프랑스 모델을 벤치마킹할 만하다. 유럽은 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석탄공동체(ECSE), 유럽공동체(EU) 같은 다자 경제·안보의 틀로 서독과 통일된 독일을 견제하면서 유럽 통합까지 실현했다. 우리도 한·중·일 정상회의,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아태경제협력체(APEC),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중층적 다자틀에 일본을 묶어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위협을 줄일 수가 있다.”

 

공 전 장관=“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각기 미국과 동맹관계다. 일본이 군사력으로 한국을 위협해 동맹 간 갈등이 생기는 건 미국이 좌시하지 않는다. 미국 입장에서도 삼각동맹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절벽을 만들고 한·일 관계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키워드에 놓고 중층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김 대기자=“위안부, 역사 인식문제, 독도 문제는 휘발성이 강한 이슈들이다. 이런 이슈에 외교·안보·경제의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 문제다. 최소한 경제·외교·안보의 기능적 관계를 복원하면서 위의 세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하는 투 트랙 접근이 필요하다.”

 

공 전 장관=“감정적으로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내 정치적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의 90%를 부담하면서도 민간기금이라는 간판을 내세웠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스스로 위안부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도록 설득하고 격려하면서 정상회담을 통해 빠른 해결을 촉구하면 된다. 독도 문제의 경우 외교교섭이나 제3자 중재는 어렵다. 평생 독도를 연구한 국제법학자 백충현 전 서울대 교수가 말한 것처럼 마찰을 지금의 수준에서 관리하며 학자들의 연구로 쌍방의 이해를 촉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 대기자=“강제 징용자들에 대한 배상문제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5월의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뒤집은 해석이 된다.”

 

공 전 장관=“한·일청구권협정은 국제조약으로 정부의 약속이다. 미쓰비시가 상고한 상황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국내에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이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할 경우 한국은 대외적으로 신용을 잃는다. 대법원 판결이 원용한 독일 법에 따르면 정부 간 협상이 개인청구권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법률학자들은 국제사법재판소나 배상조정위원회에 가면 우리가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김 대기자=“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사회저변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독일·프랑스도 도시마다 상대국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수십만 명의 청년학생들이 교류하여 사회저변의 인식 변화를 유도했다. 그것이 독일·프랑스 화해를 가능케 하고 유럽 통일과 독일 통일, 그리고 동서 유럽의 화해로 이어졌다. 우리도 긴 시각에서 한국과 일본의 군 단위까지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자매관계를 맺고 최소한 여섯 자릿수의 청년·학생이 교류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 토대 위에서만 정부 간 합의의 확실성과 지속성이 보장될 것이다.”

 

공 전 장관=“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외교정책은 추진하기 어렵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최종 단계에서 결렬된 건 국민 감정과 괴리된 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외교는 인적 네트워크다. 사회저변 확대라는 것도 하부 구조를 확충해 네트워크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

 

김 대기자=“최근의 한·일 갈등을 정말 국가이익의 충돌로만 볼 수 있을까. 문화의 충돌이라고 볼 수는 없나.”

 

공 전 장관=“문화의 충돌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의 충돌로 보는 것이 맞다. 문화적으로 보면 한류가 일본에서 짧은 시간에 확산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서울 주요 대학의 도서 대출 순위를 보면 무리카미 하루키 같은 일본 작가의 책이 많다. 문화적 교류는 많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다. 국민 감정을 자극하게 되는 건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다. 정치가 국민 감정을 악용하고 자극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정치가들이 상대방에 대해 말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김 대기자=“한·일 관계가 경색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일본에선 양심적 목소리도 나온다. 민족주의적 반일, 혐한 감정이 높아지는 와중에 양심적 목소리가 확산될 수 있을까.”

 

공 전 장관=“일본의 경우 역사를 직시하겠다던 민주당이 몰락하며 보수세력을 견제하는 목소리가 약해졌다. 지금 아베 정권에 대한 지지의 대다수는 10년 불황을 극복해낸 경제적인 역량에 대한 지지다. 하지만 크게 비관적이지는 않다. 일본 자민당 부총재를 지낸 고토다 마사하루는 ‘일본이 전후 천황제 유지를 위해 역사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