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도 낙태 논쟁의 지뢰밭에 들어서게 되었군!" 최근 불거지고 있는 낙태 논쟁에 대한 어느 블로거의 댓글이 아니다. 우려와 책임감이 뒤섞인 이 문장은 지난 1971년, 오랫동안 낙태를 금지해 오던 미국에서 낙태 논쟁이 폭발하고 그 최종 판단이 연방대법원으로 넘어오자, 사건의 판결문 작성을 맡았던 해리 블랙먼 대법관이 자신의 노트에 독백하듯 적어놓은 글이다. 그 후 2년에 걸친 숙고 끝에 미국 대법원은 낙태 논쟁의 여러 관점을 조정하는 판결문을 내놓았다. "태아가 출생 후의 생존능력을 갖추는 시기 이후에 한해서만 정부가 낙태를 규제하거나 금할 수 있다"는 판결문이 낙태 논쟁을 깨끗이 정리한 건 아니지만 후속 논의의 확고한 준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무분별한 낙태를 시행하는 의사들을 고발하면서, 우리도 낙태 논쟁의 지뢰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논쟁이 숱한 이해(利害)와 가치가 충돌하는 지뢰밭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여성의 건강권에서부터 생명의 존엄성, 무분별한 낙태 관행과 의료인들의 윤리까지, 세종시보다도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우리의 낙태 논쟁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정치학자인 필자가 이 논쟁을 푸는 실마리를 내놓을 수는 없다. 다만 이 논쟁이 한편으로는 정치권과 사법체계의 무책임·무능력을 보여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외부로부터 모범답안(答案)을 빌려오기 어려운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필자가 낙태 논쟁을 통해서 '여의도 때리기'를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주목할 것은 낙태 논쟁의 지뢰밭에서 유독 정치권만 빠져있는 배경이다. 정치권은 그동안 갈등해결의 큰 책임을 사법부에 떠넘기는 정치의 사법화를 스스로 재촉해 왔다. 문제는 사법부의 신뢰 위기와 맞물리면서 정치의 사법화가 갈등해결의 실종상태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행정수도 이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치권은 어려운 문제가 터질 때마다 헌법재판소에 공을 떠넘기는 '정치의 사법화'에 앞장서 왔다. 이번 낙태논란 역시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동료의사를 고발함으로써 솔로몬의 칼은 사법체계에 쥐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의 사법부가 정치의 다툼 위에 존재하는 '현자(賢者)들의 신전(神殿)'이라기보다는 정치에 휘둘리는 '법률 전문가 집단'의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데에 있다.

 

국회가 뒤늦게 사법개혁을 강요한다고 해서 사법부가 미국에서처럼 '마지막 현자'의 자리를 쉽사리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권 스스로가 낙태 논쟁의 지뢰밭에 뛰어들어 갈등의 조정에 나서야 한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은 전문적 의학 지식이나 사법부 군기 잡기가 아니라 책임감과 용기이다.

 

낙태 논쟁이 촉구하는 두 번째 관점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모범답안을 밖에서 수입하기 어려운 단계에 와있다는 점이다. 낙태 논쟁에는 사문화된 법 조항의 관행, 육아 시설의 미비라는 후진성과 더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현대 이슈가 자리잡고 있다. 달리 말해 선진국형도 후진국형도 아닌 한국형 지뢰밭인 셈이다. 비단 낙태 논쟁뿐이 아니다. 우리는 요즘 외교·통일·사회·문화에서 야전교범이 없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신생독립국에서 G-20 주최국으로 올라설 때까지 선발국의 경험을 수입하거나 그들의 교범(敎範)에 의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 이번 낙태 논쟁은 우리가 미개척의 신천지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이기도 한 셈이다.